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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수의 팔자 볶기

사월의 아홉수

by 저나뮤나

나중에 한참 크고야 알았는데 나는 예민한 편이다. 냄새도 잘 맡고 소리도 잘 듣고 작은 변화도 기민하게 알아차린다. 털털한 편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머리를 자르면 맘에 들지 않아 일주일을 동생한테 징징거리는 건 기본이었고, 누군가 한말이 마음에 박혀 한 달을 끙끙 앓기도 했다.


엄마는 내가 이렇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나한테 예민하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지 팔자 지가 볶는다"는 얘기는 종종 했다. 커보니 그 말이 그 말이었다.


작은 일을 작은 일로 넘기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두는 걸 그야말로 털털한 엄마가 보기에는 팔자 볶는 일로 보였던 거다.


지금은 머리가 마음에 안 들면 거울을 안 보고, 누가 모진 소리를 하면 애써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정도까지는 왔다. 누군가는 이런 일쯤은 힘을 들이지 않고도 척척해낼... 아니지 생각을 해본 적도 없을 텐데, 굳이 이런 일까지 신경 쓰고 힘을 들여야 한다니 살기가 영 대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간하다는 충청도 사투리로 피곤하다는 말이다


털털한 성격이 예민한 성격에 비해 좋다거나 아니면 그 반대라거나 그런 얘기가 아니라 그저 좀 대간하게 사는 것이 대간하다는 말이다. 대간하게 안 살고 싶은데, 굳이 대간한 쪽으로 선택을 하고야 마는 나 자신도 대간하고, 노력을 해도 벗어나지지 않는 이 기본적 예민 줄기와 마흔아홉 해를 살아온 나도 대단하다는 말이다.


가끔은 생존모드로 살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집도 절도 없고 오늘 먹을 밥도 없다면 예민하게 살 수 있는 뭐랄까, 여유랄까, 자유랄까, 선택이랄까... 뭐 하여간 긍정적인 톤으로 나열되는 단어들도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거다.


한편으로는 이런 기질도 태어났으니 이 기질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 기질로 여기까지 살아왔으니 참으로 용한 예민함이라는 생각도 한다. 집도 절도 없고 오늘 먹을 밥도 없어도 그 팔자 볶는 예민함으로 어떻게는 살아남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거다.


깨나 볶을 일이지, 왜 그렇게 팔자를 볶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큰 재미도 없는데 말이다. 그래도 한 마흔아홉 해 계속 볶다 보니 가끔 타긴 해도 달달 볶인 나만의 맛은 있는 것 같다. 대간하게 팔자를 볶고 있지만 그 덕에 지금 서 있는 곳에 섰을 테니 내가 온 나만의 길에 남겼을 냄새가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을 것 같다. (이렇게 쓰고 마무리하자니... 음... 너무 스스로에게 후한 기분이다. 맞다. INFJ라서 그런다. 팔자를 괜히 볶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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