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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분 드리겠습니다

아홉수의 친구

by 저나뮤나

친구는 나를 만나겠다고 뉴욕에 차를 가지고 왔다. 뉴욕에 가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는데, 가방으로 자리를 맡는 일, 사람들이 말 건다고 가던 걸음 멈추고 대화하는 일, 그리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이다. 뉴욕은 그 어마어마한 땅덩이 전부가 서울 강남 한복판인 양 시간 없이 막힌다. 운전자들은 고약하고 보행자들은 제멋대로다. 고함과 경적소리가 꼬리를 물고 서있는 자동차들 사이에서 쉴 새 없이 들려온다. 그런 뉴욕에, 잠깐 방문한 나를 만나겠다고 1시간 30분을 운전해서 친구가 찾아왔다.


맨해튼 한복판에 자리한 타이 레스토랑을 찾은 친구는 레스토랑 바로 앞에 스트릿 파킹을 성공했다. 운전을 해서 뉴욕에 온 친구의 용감함에 받은 감동을 다 털어낼 새도 없이, 맨해튼 한복판에 자기 차를 주차하는 친구를 보면서 턱이 떨어질 정도로 놀라움을 느꼈다. '이게 된다고?'


멋진 타이 레스토랑이다. 서버는 의자를 빼주면서 "You have 90 minutes with us" 한다. 아직 앉지도 않았다. 나가란 얘기부터 하다니. 요즘 트렌드인건가. 뉴욕 thing 인가. 앉아마자 시작되는 똑딱똑딱 타이머가 머릿속에서 돌아간다. 그러기도 잠시, "야, 우리 뭐 먹냐?" 하는 친구 말에 주의가 돌려진다. 널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코로나도 한참 전에 너를 보지 않았던가. 같은 미국땅에 살면서도 어찌 한 번을 만나 지지 않던 너를 뉴욕 한복판에서 보고 있는 거냐. 꿈같다.


파파야 샐러드를 시킬까? 하는 내 물음에, "야, 내가 한 시간 반이나 운전하고 여기까지 와서 야채 먹어야겠냐? 남의 살이 좋지." 한다. 나는 웃고야 만다. 아 너무 좋다. 남의 살이라니 킥킥-


그러고 새우며, 소고기며, 소고기 넣은 국수를 시킨다. 설마 국수에는 두부 넣겠지 했던 내 잠깐의 생각은 오만이었다. 넌 다 남의 살을 시켰다. 행복지수가 올라간다. 꿀떡.


90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오디오가 일초도 비는 순간 없이 심지어 화장실도 가지 않고 90분을 일초 단위까지 다 채워 썼다. 그 사이에 레스토랑은 만석이 됐다. 하지만 우리 식탁에는 남의 살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둘 다 오디오를 채워 넣느라 뭔가를 집어먹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네가 멋지게 마지막으로 우리 테이블 위에 올려진 첵을 집어 든다. "내가 산다." 하는 널 보며 캘리포니아에 네가 꼭 왔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90분을 보냈건만 9초 정도 시간이 지난 것 같다. 너는 맨해튼 시내를 다시 운전하기 시작한다. 이게 가능한 건가 하는 생각을 한다. 여기 주차한 건 운이 좋았다 치자. 하지만 다음에도 또 길거리에 주차할 수 있다고? 아니나 다를까 넌 주차장소를 보자 그냥 그곳에 주차를 해 버린다. 맨해튼에서 벌써 두 번째 길거리 주차를 하고 있다. 어릴 때도 그렇게 강남 한복판에 여기저기 길거리 주차를 잘하더니 너의 주차 행운은 이곳 미국까지 왔나 보다. 변하지 않은 너를 보니 고맙다. 걷는 수고를 덜어줘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나 잘 걷는다. 어린 시절 네가 가지고 있던 그 슈퍼파워를 다시 볼 수 있어서 반갑다는 말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이번에는 앉자마자 나가라는 말부터 하는 레스토랑은 아니다. 길거리에 있는 아무 데나 들어가 앉는다. 어딜 가야 하나 신경도 쓰지 않고 무얼 먹을까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다. 수다가 다시 시작된다. 무슨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는 얘기 전반을 다 건드리고 있는데 우리는 그냥 계속 웃고 있다. 이야기 내용이 웃기거나 가벼워서가 아니다. 그냥 우리가 하는 얘기니까 그게 뭐든 그렇게 얘기 나누며 모든 일이 우스워 죽겠다는 듯 계속 와하하하. 깔깔깔깔. 에헤헤헤. 이히히히. 푸하하하. 우리는 그냥 계속 웃고 있다.


서버가 키친이 이제 곧 닫는다면서 라스트 콜을 안내하러 우리 테이블에 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 모르겠다. 너랑 웃는 동안 시간을 잊었다. 마음 같아서는 우리가 늘 그랬듯 우리 집에 가서 다음날 새벽까지 와다다다 수다를 떨다 지쳐서 곯아떨어지고 싶다. 다시 한 시간을 넘게 운전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너한테 고맙다고 인사한다. 다시 보자곤 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건 그냥 너무 당연한 거라서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나를 너는 꽉 안아준다. 나도 너를 꽉 안는다. 이 짧은 포옹 안에 지난 몇 시간 일초도 낭비하지 않은 수다의 아쉬움을 담는다. 호텔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눕는다. 아주 오래간만에 유성 온천에 다녀온 느낌이다. 뜨거운 탕 안에 들어갔을 때 발끝의 찌릿찌릿을 시작으로 온몸에 피가 돌며 꽉 채워지는 그런 느낌이다. 어딘가 깨끗해진 느낌이다. 웃음으로 수다로 씻었으니 당연한 거 아닌가 하며 올라간 입꼬리를 미쳐 내리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든다.


고맙다.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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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