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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it 곰탕 or 설렁탕?

아홉수의 식탁

by 저나뮤나

"Why are we having a sit-down dinner?"


딸아이가 묻는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함께 저녁을 먹은 게 언제였나 싶다. 가족 각자의 스케줄이 제각각이라 같은 시간에 모여 식사하는 게 쉽지 않다. 게다가 어쩌다 보니 집에 식탁만 네 개다. 같은 시각에 집에 있어도 각자 자기 저녁을 들고 좋아하는 자리에 흩어져 먹는 게 더 익숙하다.


오랜만에 꼬리곰탕을 끓였다. 고기를 씻고, 틈틈히 기름을 걷어내며 사흘을 꼬박 정성 들였다. 뽀얗게 우러나온 국물을 보니 흐뭇하다. 마침 오후 약속 덕에 일찍 퇴근해 반찬을 만들고 저녁을 준비했다.


네 식구가 모이니 벌써 7시 30분. 조금 늦은 저녁이지만, 다 함께 모여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Why are we having a sit-down dinner?"


딸아이는 기분이 좋지 않다. 날을 세워 다시 묻는다.


그게 질문이 될까 싶지만, 그냥 궁금해서 던진 말이겠거니 하고 넘긴다.


그러고 보니 대학 발표가 난 날이다. 원하는 결과는 아니었다. 이미 합격한 학교도 있고 아이가 그리 가고 싶어하던 학교도 아니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막상 리젝이 써졌있는 편지를 받고 보니 마음이 무거운거 보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TV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다. 우리 집은 흑마술에나 걸린듯 대화가 시작되면 금세 열띤 토론장이 된다. 가볍고 요점 없는 얘기로 노닥거리는게 좋은 나로서는 토론장 풍경에는 영 적응이 안된다. 무거운 말들이 날카롭게 오가는게 불편하다. 게다가 밥을 먹는 자리아닌가.


우유처럼 뽀얀 꼬리곰탕이 내 앞에 놓여 있다.


"Is this 곰탕, or 설렁탕?"


딸아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묻는다. 곰탕이든 설렁탕이든 그게 왜 화가 날 일인지는 모르겠다. 아마 대학 발표 결과로 마음이 뒤숭숭한 탓이겠지. 이해하고 넘긴다.


날카로운 말들이 오가는 식탁에 정성껏 차린 음식이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어때? 파 맛이 좀 다른 것 같지 않아? 마당에서 길렀어. 향이 더 진하고 연하더라."

"곰탕 색깔 예쁘지? 우유 같지? 이틀이나 끓였어."

"감자 맛있지? 여태 왜 이렇게 안 됐나 했더니 전분을 빼야 되는 거래. 요리하기 전에 물에 10분 정도 담가야 한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도 못하고, 식탁 위에서는 대학 이야기만 오간다. 학비 문제, 거리 문제, 친구 문제, 건강 문제...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넘어갈 주제가 없다.


밥맛이 떨어진다. 이걸 먹으려고 사흘이나 시간을 들였는데, 억울하다. 나 혼자 먹자고 차렸다면 누룽지밥 하나 끓여 먹고 끝냈을 일이다. 수고를 몰라주는 사람들은 그렇게 왕왕하며 밥을 먹는다.


'꼬리곰탕이다. 이건 꼬리곰탕!'


척 봐도 소꼬리가 보이는 꼬리곰탕이다.


복잡한 생각이 오간다. 이 식탁을 너는 어떻게 기억할까.


화가 잔뜩 나있는 와중에도 너는 꼬리곰탕에 내가 키운 파를 넣고 질 좋은 천일염을 넣은 후 후후 불어 떠먹는다. 화가 나고 신경이 곤두 서 있었지만 그 날 먹은 꼬리곰탕은 맛있었다고 이 식탁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학비, 거리, 친구, 건강 다 중요하지만 엄마가 차려준 이 밥상도 그만큼이나 중요했다고 시간이 한참 지나면 알았으면 좋겠다.


대학을 가고 집을 떠나고 어른이 되면 내 마음 내키는대로 화를 낼 수 있는 집이, 그리고 그 화를 받아주는 엄마가, 그리고 속이 진뜩 상해 집에 돌아왔을 때 상을 가득채운채 차려져 있었던 저녁밥상이 기억났으면 좋겠다.


어느 새 한그릇을 다 비운 네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직도 기분이 별로인 채다. 네 방을 향하는 너를 막지 않는다. 그저 뽀얀 곰탕 국물이 네 속에 칙칙한 기분들을 희석시켜주길 바랬다. 그렇게 마음이라는 게, 산다는 게 쉬운 일이 될 수 있기를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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