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었어가지고
나는 70년대에 태어나 문화 대통령이라 불리던 서태지의 통치(?)를 받으며 자랐다. 우리는 엑스세대라 불렸고 제멋대로 사는 것이 멋처럼 여겨지던 시절에 20대를 보내는 특권을 누렸다. 그때 만들어진 드라마 중에 이나영, 양동근이 주연으로 연기한 '네 멋대로 해라'라는 드라마가 있는데 이 드라마 제목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만의 말을 가졌다. 2025년에서 보자면 이미 오래전에 퇴물이 된 낱말들이지만 나에게는 그 시절의 공기를 기억하게 하는 작은 표식 같은 것들이다. 담탱이, 캡, 짱 같은 것들. 이렇게 글로 써놓고 보면 자꾸만 지우고 싶은 생각이 드는 그런 말들이다. 지금은 새롭지도 않고 이물감도 없이 이 사회에 자리 잡은 지 오래된 구닥다리들이다. 무엇보다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뭐뭐했거등요" 하는 말투다. 끝을 길게 늘이며 콧소리를 조금 섞은 종결어미. 요즘은 90년대 서울 사투리라며 코미디 소재로도 자주 소비되고 있는 그 말투다.
그 시절 우리 중 누구도 의식적으로 그런 단어들을 사용하거나 그런 말투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냥 그게 자연스럽다고 여겼고 그게 쿨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런 낱말과 말투는 세대를 구분 짓는 하나의 절취선 같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세대와 우리 세대를 가르는 우리만의 습관과 우리만의 문화가 우리에게 엑스세대라는 정체성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요즘 젠지(Gen Z)들도 그들만이 구사하는 단어들이 있고 그들만이 사용하는 어투가 있다. 신기한 방식으로 비틀어진 기존의 단어들 혹은 새로운 단어의 조합과 새로운 질서들은 마주칠 때마다 호기심이 발동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내 관심을 끄는 어구가 있는데, 이거다.
"그랬었어가지고."
젊은 세대일수록 입에 익은 이 말은 내 어린 시절에는 전혀 없던 어구다. 우리에게는 "그래가지고"가 있었을 뿐 "그랬었어가지고"는 없었다. 어느 날 가만히 앉아 그랬었어가지고를 조용히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뭐, 개똥 같은 생각이지만 나름의 결론은 초등학교부터 영어가 필수과목으로 자리한 세대부터 시작된, 그 세대를 특징짓는 절취선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영어라는 언어가 자연스럽게 스민 세대들의 한글에는 그전 세대에는 볼 수 없던 이종의 꽃이 피어난 것이다.
우리말 시제는 단순하다. 과거, 현재, 미래. 단 세 개의 시제로 역사에서 일어난, 일어나고 있는 그리고 일어날 모든 일들을 표현한다. 그러나 영어에는 무려 12개의 시제가 있다. 우리에게는 없는 완료시제와 진행형 시제, 완료진행형 시제가 존재해서 시간을 더 세밀하게 쪼개어 인식한다. 대과거, 과거완료, 과거완료진행, 단순과거, 단순현재, 현재진행, 미래완료, 미래완료진행.... 열두 개를 다 쓰자니 정말 이런 시제까지 필요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시제를 어려서부터 체화한 세대들에게는 "그래가지고"라는 단순한 과거시제의 설명으로는 과거의 한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른바 완료형 시제를 개운하게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물리적으로 똑같은 시간을 살았다 해도 그들이 살아내는 시간의 감각과 우리가 살아내는 시간의 감각의 차이는 열두 겹이나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좀 뜬금없는 말이지만 여기서 나는 사투리를 생각했다. 표준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말들을 우리는 사투리라고 하는데, 사실은 사투리가 있어서 언어의 세계가 넓게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표준어가 포착하지 못하는 결을 사투리는 자기만의 높낮이와 리듬으로 드러낸다. 사투리가 있어서 표준어라고 불리는 것들이 더 정교해지고 풍부해질 수 있고 더 많은 것들을 인식하고 감지할 수 있게 된다는 생각을 한다.
사투리가 지역 간의 경계로 인해 발생했고 그로 인해 우리말이 확장되듯이, 각 세대만의 독특한 은어나 말투는 세대 간의 경계로 인해 발생했고 그로 인해 우리 전체 세대의 언어를 확장한다고 생각한다. 경계에 선 단어들은 절취선처럼 불연속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경계가 모여 더 큰 세계를 열어주는 것이다.
앞으로도 새로운 단어와 화법은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방언이 혹은 사투리가 자꾸만 표준어로 흡수되는 현상은 우려스럽다. 언어가 확장되는 생생한 장면을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세대어를 통한 언어의 확장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그 끝을 다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그렇게 언어가 확장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있다.
문화대통령이라 불리던 서태지는 오래전에 은퇴했고 엑스세대는 이제 중년이 되어 더 이상 네 멋대로 살지 못한다. 우리는 멋없게 하루하루 정해진 생계의 몫을 감당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 시절이 남긴 언어와 감각, 또 새로 생겨나는 언어와 감각 덕에 살면서 더 풍성해지는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계속해서 확장되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일은 멋진 일이다. 알지 못했던 것들을 계속해서 알아가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나이를 먹는 일이 좋아지는 이유다. 아홉수가 즐거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