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다른 자리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상황은 분명 펑펑 울어야 할 상황인데 눈가가 물 한 줄기 없는 한낮의 사막 같다.
예전 같으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숨까지 가빴을 텐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대신 쓸데없는 눈물이 늘었다. 피곤한 눈에서 저절로 흐르는 눈물, 바람에 자극받아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 마치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감정과 무관하게 터져 나오는 눈물방울들. 아이러니하게도 여전히 감정의 홍수 앞에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마음이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다. 한때는 창밖의 구름이나 스쳐 지나가는 노래 한 구절에도 쉽게 눈가가 촉촉해졌는데, 요즘은 마음에 철판을 두른 듯 단단하다. 이것이 단련의 결과인지, 아니면 무뎌진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나이 들며 대책 없이 늘어나는 체중만큼이나 굳어가는 마음이 낯설다.
그래도 이별 앞에서 울지 않는 건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뭔가 중요한 절차를 건너뛴 듯, 붕어빵에 팥이 빠진 듯 허전하다. '마음이 아프긴 한데, 눈물이 나올 만큼은 아닌 걸까?' 스스로 묻지만 곧 생각을 거둔다. 눈물이 슬픔의 절대 척도는 아니니까. 지혜롭지 못한 질문이다.
그럼에도 막상 맞닥뜨리면 어색하다. 울어야 하는 순간, 표정과 몸이 돌처럼 굳어버린다. 상대가 눈물을 훔치는 동안 나도 같은 무게를 느낀다는 사실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말로 설명하자니 그런 순간에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는 건 몹쓸 짓이다.
며칠 전 읽은 책에서는 이를 호르몬의 변화로 설명했다. 갱년기에 접어들면 에스트로젠이 줄고 그와 함께 '애정 호르몬'이라 불리는 옥시토신도 줄어든다. 누군가를 품게 하고, 품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게 하던 그 힘이 서서히 사라진다. 생각해 보면 요즘 나의 건조한 일상과 심드렁한 반응이 꽤 그럴듯하게 설명된다.
물론 이 설명은 내 감정을 호르몬 탓으로 돌리는 편리한 면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탓할 대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잘못은 내게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변화 그 자체에 있으니까.
나이를 먹으며 알게 된 것은 눈물이 꼭 눈을 통해서만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감정은 여전히 깊지만 - 어쩌면 전보다 더 깊지만 - 그 깊이가 곧장 눈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대신 나지막이 내쉬는 한숨 속에, 목소리의 떨림 속에, 오래된 사진을 바라보는 침묵 속에 조용히 스며든다. 눈물의 경로가 바뀐 것이다.
예전엔 감정이 마음에서 곧장 눈으로 흘렀다면 이제는 가슴을 지나 손끝, 목소리, 혹은 기억의 오래된 창고를 거쳐야 한다. 그래서 늦다. 때로는 며칠, 몇 달이 지나서야 그때 흘렸어야 할 눈물이 불쑥 찾아온다. 그래서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고 아무 때나 눈물이 불쑥불쑥 흘러나오는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스며든 슬픔은 쉽게 마르지 않는다. 눈물도 나이가 들고, 나도 나이가 든다. 감정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조금 기다리는 일. 그 기다림 속에서 오롯이 품어진 감정이 나를 숙성시키는 일. 어쩌면 그것이 진짜 나이 들어간다는 것일지 모른다. 눈물이 내 안에 오래 머물러 더 깊은 곳을 지나 마침내 내 곁에 남는 친구가 된다. 눈물의 새로운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