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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수의 시드는 일

단정한 아름다움

by 저나뮤나

집안에서 꽃을 보는 일은 품이 들어간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을 꺾어다가 줄기를 다듬고 잎들을 떨궈내고 물을 잘 머금을 수 있게 정성스레 줄기 아래에 각을 주어 자른다.


화기에 꽃을 꽂는 일도 정성이 들어간다.

이쪽에 짧은 것을 꽂거나 저쪽에 긴 것을 꽂거나 혹은 이쪽은 주황색, 저쪽은 하얀색, 이렇게 저렇게 모양과 색을 바꿔가며 꽃 각자의 자리를 찾아 앉힌다.


그렇게 만들어진 화기 안의 작은 균형 안에서 계절 하나가 환하게 피어난다.

화기 안에 만들어진 작은 균형의 우주는 생생하고 싱싱하다.


며칠 동안 물속에서 여전히 싱싱한 줄기와 여전한 힘으로 화기 위로 고개를 든 꽃을 보며 어떤 종류의 기쁨을 얻는다.


그러기를 며칠, 꽃잎의 가장자리가 말라 들고, 잎맥이 얇아지고, 잎들이 초록을 잃어간다.

나는 부지런히 물을 갈고 줄기를 조금 더 잘라내고 화기 안 우주의 생명을 섬세한 손길로 늘려본다.

그럼에도 결국 꽃은 저마다의 속도로 시든다.

어떤 꽃은 며칠을 더 버티고, 다른 꽃은 물을 갈아주고 줄기를 쳐내줘도 떨군 고개를 다시 올리지 못하고 그렇게 있다.


조용히 그 순간이 온다.


꽃의 향으로 가득하던 공기는 회갈색의 냄새로 채워져 나가고 화기 안 우주의 작은 균형은 새로운 평형점을 찾으며 사그라든다.


작은 변화를 눈치챌 때마다 조금씩 미안한 마음이 든다.

시든 꽃을 뽑아내는 내 손끝이 누군가의 생을 지워내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요즘은 꽃을 쉽게 버리지 않는다.

잎이 말라붙고 색이 바래도 며칠쯤은 그냥 그대로 둔다.

화려함이 걷힌 자리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꽃의 마지막을 본다. 누군가 의식적으로 보려 하지 않았을 그 마지막을 함께 한다.


꽃은 아무런 의욕도 빛도 생기도 없다. 균형의 추는 이미 한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시들어버린 꽃으로 가득한 균형 잃은 화기를 보고 있자면 이상한 종류의 질서가 보인다.


끝을 맞이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때의 빛을 잃은 것을 향해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일은 고유의 아름다움을 말한다기보다 그 전의 아름다움을 전제하는 말처럼 느껴져서다.


하지만 시간이 다 지나 빛을 잃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 아닌 다른 단어로는 떠올릴 수가 없다. 끝을 맞이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코스모스 한송이가 시들어 고개를 떨군다.

그 초로의 얼굴에 한 때의 자부심이 남아있다. 잎맥마다 지나온 계절의 흔적이 묻어 있고 색을 잃은 꽃잎은 마치 바람에 수천번을 나부껴 이력이 난 천처럼 힘이 없다.


코스모스 앞에서 나도 고개를 숙여본다.


살아있는 동안 가장 화려했던 얼굴이 아니라,

다시 흙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친 얼굴을 마주 보며 마음이 고요해진다.

색도, 생기도 잃었지만 여기까지 왔다는 이유로 고개를 숙일 수 있었던 꽃을 보며 사람의 얼굴에 대해 생각한다.


누구나 한때의 빛으로 살아가지만 결국 그 빛을 내려놓은 순간이 온다.

그 빛을 자연스레 내려놓을 수 있는 순간까지 올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많은 것을 가진 것이다.


나는 천천히 그러나 단정하게 시들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 모습이 "아름답다" 생각한다.

그 모습 그대로 썩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을 아름다움이 아니면 무어라 불러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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