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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수의 지진

알면 두렵지 않던가

by 저나뮤나

며칠 전 한밤중에 집이 크게 흔들리며 잠에서 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찾아온 흔들림은 오래간만에 맞이한 제대로 된 지진이었다. 그 순간 십 년 전의 기억이 스쳐 갔다. 나파에서 진도 6의 지진이 났었는데 비록 한 시간 떨어진 곳에 있던 우리 집이었지만 폭탄을 맞은 듯 큰 소리와 함께 집 전체가 흔들렸다. 굉음과 공포가 오래도록 남았고 그날 이후 나는 지진이 자연현상을 넘어서는, 근원적인 공포를 드러내는 체험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크고 작은 지진을 수도 없이 겪었다. 어느새 익숙해져 웬만한 흔들림은 '또 지진인가 보다' 하고 지나갔지만 며칠 전의 지진은 달랐다. 진앙지가 가까웠던 탓일까, 진도 4.6의 지진 체감은 수치보다 훨씬 컸다. 벽에 걸린 그림이 떨어지고, 장식장이 요동치며 물건이 바닥에 내팽겨졌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한밤의 지진은 말 그대로 공포였다.


사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예고 없이 사건, 사고에 휩쓸리며 산다. 서른 즈음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을 때 가장 크게 부딪힌 것도 그것이었다. 익숙한 언어와 질서가 사라진 자리에 찾아온 낯선 사건들,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 어린 시절,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며 나름은 힘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때의 고집과 말들은 아직 세상을 모르는 아이의 순진한 고백 같았다. 그 시절 내가 삼십 년 뒤의 삶이 이렇게 전혀 다른 모습으로 펼쳐지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그건 아마 그렇지도 않았을 것 같다.


우리는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 알면 대비할 수 있고, 대비하면 안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점집에 줄을 서고, 타로샵이 성행하는 이유도 다 그런 이유다. 하지만 미래를 안다고 해서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누구나 죽음이 온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사실이 삶을 더 평온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지진이나 기후를 예측하는 과학도 그렇다. 예측은 준비를 돕지만 실제로 닥쳐온 순간의 흔들림은 언제나 예상을 넘는다.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결국 대비하고 싶다는 욕구이다. 불확실성을 줄이고 싶은 욕망이다. 손실을 줄이고, 계획할 수 있다면 괜찮으리라는 논리다. 그러나 현실은 늘 논리를 넘어선다. 변수가 사방에 흩어져 있고 우리의 계산은 그 앞에서 수많은 수정을 요구받는다. 준비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준비 자체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정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안정감이 흔들림이 없을 거라는 바람에서 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또 완벽한 준비에서 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안정감은 세상이 흔들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찾아온다. 삶은 예측 가능한 내일이나 완벽한 대비가 아니라, 흐름을 타려는 열린 마음과 유연한 태도 속에서 오히려 길을 내어준다. 그리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어떤 힘 - 사랑일 수도 있고, 믿음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저 나보다 더 큰 존재에 대한 의존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무언가 -이 우리를 붙들어 준다고 믿을 때 길을 찾기도 한다.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멈춰 서면 멈춰서는대로 그 안에서 살아낼 수 있다는 자각이 안정감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안정은 내 안에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과 밖을 오가며 차츰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 같다. 더 많이 준비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준비의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 뜻하지 않게 마주하는 선물이다. 불확실성을 지우려 하기보다 그것을삶의 일부로 품을 때, 안정은 우리를 조용히 찾아온다.


앞으로도 캘리포니아는 흔들릴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사는 일도 계속해서 사건, 사고를 통해 흔들릴 것이다. 흔들림은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는 일에 집중하는 대신 무엇이 내 삶을 지지할 수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이번 지진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덕분에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았던 "뭐시 중한디"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흔들리면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불안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 이게 중요한 거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나의 삶이 내가 노력해서 준비한 대비를 벗어나더라도 계속 살면 된다. 사는 것 자체가 흔들림보다 크고 살아야만 흔들림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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