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당신을 위하여
해고 통보
“여로 씨, 요즘 건설 경기가 부쩍 안 좋아진 거 알죠, 회사가 어려워져서 더 이상 본 지사를 운영할 수 없다는 회의 결과가 나왔고…….”
나는 인사팀장님과 이야기 나누면서 절대 울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애정이 많이 갔던 회사였다. 내가 맡은 일은 최선을 다했고, 나아가 일개의 사원으로서 어떻게 하면 회사의 성장에 도움 될 수 있을까 고민도 많이 했었다. 그런 내 마음들과는 달리 회사는 사정이 어려워지자 나에게 나가달라 말했고, 살면서 해고 통보는 처음 받았던 터라 충격이 더욱 컸다. 본사 발령도 있고, 다른 지사로 발령하는 대안도 있었을 텐데 그냥 나가라는 말이 마치 ‘너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라는 말과 다름 아니게 느껴졌고, 그것은 나를 좌절시켰다. 마치 연인 간에 헤어질 때 받는 상처처럼 한동안 내내 쓰라린 마음이 들었다. ‘그래, 나 혼자만 회사에 진심이었지. 회사는 나 하나 없어도 잘만 돌아가는 거구나.’
‘설상가상(雪上加霜)’, ‘병상첨병(病上添病)’이란 말이 모자랄 만큼 너무 큰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내 몸에 암세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지 보름도 채 되지 않아 해고 통보를 받다니, 드라마도 이런 드라마가 없다. 믿기지 않는 일들이 연거푸 일어나니까 오히려 웃음이 났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도 생각이 들었다. 암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가장 오래 고민했던 것도 다니고 있던 직장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회사원의 신분으로 성실하게 출근은 했으나 하고 있는 일로서 만족을 해본 적이 없었다. 신입사원일 때는 인사하는 방법부터 모든 것이 배움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느낌을 받기가 어려웠다. 나중에는 내 영혼을 팔아 돈 몇 백으로 바꾼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공허한 마음이 들곤 했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한 일은 내 영혼을 갉아먹었고, 내 눈의 총기도 점점 사라져 갔다. 나의 열의가 사라져 간다는 것을 당시에도 어렴풋이 느끼긴 했지만, 다른 길을 생각해 보기엔 당장 출근할 체력도 부족했기에 다른 생각을 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어려운 선택을 회사가 대신해준 셈이니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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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나오고 나서 본의 아니게 자유의 몸이 되어버렸다. 퇴직금으로 받은 돈과 무한정의 시간이 있으니 나는 어디에서나 머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평소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미국, 스페인 등 갈 수 있었음에도 왜인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남자친구가 자기가 있는 곳에 와서 같이 있자고 했고,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짐을 쌌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산 지도 햇수로 4년이 되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짐을 쌓아놓고 살았는지, 짐을 싸는 일보다 버리는 일을 더 많이 했을 정도다. 두 해가 넘도록 입지 않았던 옷, 두 개씩 가지고 있는 비슷한 물건들 등등 최근 1년 동안 쓰지 않은 물건들 또한 즐비했다. 회사를 다닐 때는 일주일에 한 번 집 청소하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에 이렇게 케케묵은 짐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렇다고 일을 할 때 정말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것도 아닌데, 회사에서 시간을 뺏기고 그나마 남은 내 시간이 욕심나서 오래된 짐을 정리하는 일은 늘 뒷전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짐을 정리하며 서울 갈 채비를 했다. 남자친구와 몇 번이나 헤어지고 다시 만난 터라 또 언제 헤어지게 될지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짐을 싸려고 하니 막막해졌다. 32리터 배낭을 짊어 맬 것인지, 24인치 캐리어를 끌 것인지도 긴가민가 했다. 특히나 이런 겨울의 끝자락에서 정해져 있지 않는 체류 기간은 내 짐을 무겁게만 했다.
매여있던 회사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떠난다 하니 설렜다. 정해져 있는 것이 없고, 하고자 하는 바도 없이 그 사람이 있다는 것 하나만 보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