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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Apr 22. 2024

공항에서 붙잡혔다

지금 우시는 거예요? feat.INFP

처음이었다.

공항에서 잡히기는...


어디를 돌아다녀도 즐겁게 다닐 수 있는

그런 파워가 대한민국 여권에 있었다.


그러나 이 초록색 여권으로 요즘

러시아에 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설마 하던 그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보통 하는 생각이 있다.

'나는 아니겠지'


엄마가 암진단을 받기 전날까지도

우리 엄마는 암에 안 걸릴 줄 알았다.

그런 맥락이다.



나는 걸음이 빠른 편이다.

그날은 더 빨랐다. 줄이 길어지면 곤란하니까.

그리고 폰 충전기를 실수로 짐에 넣고 부쳐서

배터리마저 간당간당해 빨리 빠져나가야 했다.


금방 내 순서가 되었다.

미안하지만 심술궂게 생긴 여자가 역시 매우

심술궂은 눈빛으로 나와 여권을 번갈아 볼 때

'아, 이 사람 쉽지 않겠구나' 직감했다.


처음에 일부러 인사를 했기 때문에

러시아어로 나에게 묻기 시작했다.


왜 왔죠?


그렇다. 이 질문이 포인트이다.

그런데 내가 정말 왜 왔는지 설명하기에는

상황이 참 애매하단 말이다. 나라끼리 지금

사이가 안 좋아도 금지 국가는 아니지 않나.


- 관광입니까?


- 아뇨


이때부터 눈빛은 더욱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관광하러 왔다는 것은 너무

웃기는 일이다. 조금만 털면(?) 여기에서 한때

살던 사람인 것을 알 텐데 무슨 관광을 오겠나.


대답하는 중에 이미 깨달았다.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 아니다. 내 여권도 정말 의심되어

돋보기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위에서

시켰기 때문에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러는 것.

북한사람이었으면 진작에 통과시켰을 것이다.


이렇게 관계가 변해 있구나 실감했다.

일부러 나긋나긋하고 밝게 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전혀 소용없었다. 한참을 서 있다가,

그래도 보내주기를 바랐는데 내 칸은 뒷사람을

받지 않겠다는, 즉 여긴 문제가 생겼으니 다들

다른 줄로 가라는 표시를 하며 또 다른 직원을

호출했다. 그 직원은 나를 근처 의자에 앉혔다.

줄로 막아둔 제한구역이었는데 잡힌 승객

여럿이었다. 몇 분 뒤 그 여자가 새로 여권심사

거절당한 사람을 데려왔는데 맙소사 직전까지

기내에서 내 옆에 앉았던 바로 그 남자였다.


하필 그가 또 내 우측에 앉자, 묘해졌다.

마치 아까 비행기에서 1편, 여기에서 2편처럼.

내 타입이었다면 의미를 부여해도 될 법 한데

전혀 그런 의미를 부여할 이유는 없었다. ㅎㅎ


러시아가 전쟁을 하면서 관계가 나빠진 국가가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았다. 동양인은 나 하나뿐.


이럴 줄 알았다면 화장실이나 먼저 다녀올걸.

이제 여기에 갇혀서 나갈 수 없었다. 화장실에

가겠다고 말했다가 괜히 의심 살까 봐 참았다.

비행기에서 갈걸. 줄 서기 전에 갈 걸 하면서.

물 마시지 말 걸... ㅋㅋㅋㅋ


그래도 뭐 언젠가는 내보내주겠지 별 수 있나

하며 옛날의 그 메트로 경찰서에서처럼 편히

기다려보고자 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그때와

확연히 달랐다. 그리고 내 폰 배터리도 걱정..


기다리는 이들의 표정도 어두운 편이었다.

저 사람들은 왜 이곳에 왔을까? 나처럼 환영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굳이 올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여권심사자 표정이 가장 안 좋았다.

아무리 봐도 어떤 명령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뉴얼대로 한다면 심술부려 오래 잡아 둘 텐데...

하나님 저 빨리 내보내 주세요 화장실도 가야돼요



10여 분  멀리서 내 이름이 들렸다.

솔직히 생각보다 빨리 불러서 조금 놀랐고

생각보다 발음도 잘했다. 물론 이상했지만.


이번 심사자는 젊은 여자였는데, 인상이 좋고 

예쁜 얼굴이었다. 다만 표정이 아주 굳어 있었다.

나를 괴롭혀야 하니까...?!



다시 여권 심사대에 섰다.

여권을 펼치며 얼굴을 확인하길래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안경도 벗었다. 대체 왜인지  여권사진도

옛날처럼 역대급 거지버전.. 대관절 왜...

원래 이렇게 생긴 것인가 라기에 비통한 샷이어서

셀프 분실하고팠으나 할 수 없이 가져간 여권이었다.


- 러시아어를 할 줄..

- 러시아어 합니다.

- 아, 그럼..


무의미한 질문을 시작하려는 찰나, 나도 모르게

그녀의 말문을 막아버리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별 설명이 없으면 안 될 느낌이었는지

본능이었는지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 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에 몇 살에 음악 배운다고 왔고,

그렇게 어떤 세월을 여기에서 보내며 살았고,

무슨 학교를 졸업했고 뭘 전공했고, 교수님들

친구들 어쩌고 저쩌고.. (거의 다들 떠났지만)

10여 년 만에 이러이러해서 잠깐 왔다.


그런데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나한테 이러니까...)


감수성이 너무 풍부한 나머지,

묻지도 않은 '나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나는 본래, 특히 러시아에서 말을 잘 하지 않았다.

95% 듣고 네, 아뇨, 아 뭐, 별로, 좋아요 이런 대답

정도 할 뿐. 오래 사는 동안 쏟아붓듯 말하는 건

발 상황에서 두어 번 정도만 해 본 기억이 있는데

세 번째 역사를 10년 만에 공항에서 쓴 것이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지금 우시는 거예요...???



나는 울고 있었다.

소리를 낸 것은 아니지만, 눈물이 줄줄 쏟아지자

여권 심사자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지금.. 우시는 거예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때문에 질문마저 잊은 듯..


"죄송합니다. 눈물이.. ㅠㅠ"


눈물을 닦아도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그러 의미심장한  마디를

나도 모르게 꺼내어 호소했다.


내가 들어도 꽤 강렬했는데 이것은 마치

내 안의 다른 이가 이야기해 준 것 같았다.


그 말을 들은 그녀는 아무 말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과 느낌으로 보았다. 나에게 설득되었다.

혹은 마음이 완전히 풀어졌다.


한 번만 더 얼굴 잘 보여주시겠어요?



바로 보내줄게 라는 말로 들렸다.

나는 다시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예상대로 그녀는 바로 여권을 넘겨주며

서로 눈이 마주쳤는데 알던 친구 같았다.


'그래,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니

나라 상황이 이런 걸. 속상했겠다'

하는 눈빛에 둘 다 민망하게 웃었다.



울지 마세요.



울지 말라고 달래주는 위로를 받고

여권심사대를 통과해 짐을 찾아 나왔다.



울다니.

그 오랜 세월 간, 공항에서 단 한 번도 눈물 흘린 적

없는데. 어디 간다, 헤어진다 등의 이유로 우는 게

너무 웃겨서(미안합니다) 공항에서만큼은 울 일이

결코 없었는데, 이 나이에 여권심사장에서 울다니.


"울지 마세요"


그녀의 따뜻한 미소가 생각나서 웃었다.




공항에서 몇 시간 기다리셨어요?


- 네?

- 입국 심사요

- 아.. 한.. 다 합쳐서 10-15분?

- 어머, 정말요?

- 네.

- 평균 한 시간 이상 걸리는데...

- 아 정말요?


- 10분 만에 나왔어? 너 정말 빨리 나온 거야.

- 아, 그런가요?

- 그럼. 저번에 보니까 아기가 있어도 안 봐줘.

 애가 있는데도 3시간 잡고 안 보내주는 것도 봤어.

- 정말요??


- 한국인 한 시간 이상 붙잡아 두라고 한다나 봐요.

- 그런 것 같아요.


- 엇, 어떻게 그렇게 빨리 나오셨어요???

- 아.. 그게.. 본의 아니게 울어가지고..

- 와 신박하다! 우리도 다음에 써먹어야겠다.

- 아니 그게.. 울기만 했다고 그런 건 아니...



한인교회에 몇 남지 않은 이들과의 대화 뒤에야

내 일정을 위해 기도하시던 부모님 생각이 났다.

이야기를 들은 부모님은 그 뒤 더 많은 기도를

해주셨고, 출국일에는 공항 가는 길부터 너무나

'신기할 만큼', 심지어 지나가는 러시아인들마저

릴레이 하듯 나를 도와주거신경 써주었으며

그날의 출국심사는 편의점 결제보다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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