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울 수밖에
어제 따라 그렇게도 웃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낫네.. 어젠 엄청 불편해했잖아.
나한테도 막 빨리 가라고 하고. 얘 어제 공연 전에
저랑 얘기하는데 계속 시계보고 빨리 들어가라고
하고 막 쫓아내려고 그랬어요."
그날은 둘만 있었고
지금은 셋이 있잖아,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유가 정말 그것 때문인지는 나도 잘 모르니까..
- 어제 예민했어?
- 어.. 어제 좀 많이 예민했어. 마치 예술의 전당에
처음 간 사람처럼, 사람 많은 게 압박스럽더라고.
여긴 조용해서 참 좋다~
- 여기도 좀 있다 많이 올 거잖아.
- 그렇지. 아직 공연 한 시간 전이니까..
- 대한항공 승무원 할 때 어느 나라..
어느 나라가 가장 좋았냐는 식상한 질문인가..?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보고 말한다. 묻는다.
- Passenger..
- "승객"
엇.. 설마 진상 물어보려고...(역시...ㅎㅎㅎ)
- 어느 나라 승객이 가장 '진상'이었어요?
- ㅋㅋ 와, 한 번도 안 물어봤는데 나도 궁금하네.
- 음.. 다양하지만 아무래도 인도사람들이 가장....
- 아,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 왜? 인도가 어떤데?
- 인도 사람들은... 기내 화장실에서 샤워를 해...
- 어, 뭐라고..?!?!??!!???
- ㅋㅋㅋㅋㅋ 역시 인도일 줄 알았어~
- 어떻게 알아? 뭐지..?!
- 나는, 모든 professional들에게 물어봐, 진상..
진짜...ㅋㅋㅋ 각종 직업군 진상 잘 알겠군..ㅎㅎ
- 그런데 기내 화장실에서 샤워를 어떻게 해?!
(Emirates First Class도 아닌데..!)
- 기내에서 주는 컵 있잖아~
- 응
- 그걸 여~~러 개 모아서 가지고 들어가..
- 응
- 그리고 거기에 물을 받아서.. 몸을 이렇게.. 씻어.
흉내를 내는 친구를 보자니 기가 막혀서 웃음이....
저렇게 지적이고 우아한 여성이 이상한 표정으로
보이지 않는 종이컵을 손에 들고 몸에 물을 뿌리...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말문이 막혔다.
- ㅋㅋㅋㅋ 잠깐만.. 아니 잠깐만.. 그게 무슨 말..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그러면 바닥 카펫에 물이 스며 흘러나오기 시작해.
이게 뭐지? 하고 보면 인도승객이 샤워 중인 거야...
- ㅋㅋㅋㅋㅋㅋㅋㅋ
- 아니 근데, 샤워를.. 옷을.. 어떻.. 어...떻...게..
- 어, 지금 들은 그대로야. 생각하는 그대로야~
화장실에서 옷을 다 벗고 몸에 물을 뿌리는 거야.
남사친마저 내 친구 따라 보이지 않는 종이컵으로
몸에 물 붓기 흉내를 내는데 이상한 춤동작 같았...
- !!! ㅋㅋㅋ 어떡해.. 어머, 어떡해 미쳤나 봐 진짜..
나는 거의 좌절할 듯 몸을 돌이키며 마구 웃었다.
이건 웃겨서 웃는다기보다는 몹시 당황한 탓이다.
- Floor drain.. 없죠?
- 없죠~ 그대로 바닥에 물이 흘러나오...
그래서 제가 '뭄바이 노선' 하면 아주 그냥....
내가 승무원 5년만 한 게... (=참 다행이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그 외에도 셋 사이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에 나는 유난히도 웃음보가 많이 터졌다.
컨서트홀에 들어가서도 내 표정은 유독 밝았다.
- 오늘, 너랑 같이 연주 보는 게 가장 행복한 일이야.
- 나야말로 이런 좋은 연주회에 올 수 있게 해 줘서
정말 고마워. 홀도 너무 아름답다.
- 표는 친구가 준 건데 뭘~. 와, 자리 정말 좋다.
근데 여기 가까워서... 서로 얼굴 다 보이겠는데?
- 아, 정말?
- 응. 저-기 맨 앞에, 저기가 친구 자리야.
- 되게 잘하나 보다.
- 오케 자리가 실력순이기는 하지...
- 근데 네 친구 되게 잘 생겼다.
- 응?
- 잘 생겼어~
- 잘 생겼다고?
- 어, 너무 잘생겼는데? 잘 생겼잖아.
- 내가 눈썰미 없어서 잘 모르는 건가...
- 잘 생겼잖아. 뭐랄까, 눈빛이, 뭔가 있어.
맑고 선해, 눈빛이.
- 아, 그거 맞아. 사람이 진실해. 되게 착해.
- 그래, 진실한 거.
- 응, 가식이 너무 싫대. 그게 다 보인대.
진실하지 않은 거 엄청 싫어해. 나랑 똑같아.
- 결혼을 왜 이미 했을까..?
- 응..??
- 결혼 안 했으면 너랑 잘..
- 아, 잠깐만! ㅋㅋ 뭐라고? 그렇게 생각할 정도야?
어머, 그 정도로 좋게 본 거야 지금? ㅎㅎ
- 응, 사람이 너무 괜찮잖아~ 잘 생기고..
- 그렇게 잘 생겼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건데..
“She says, you're handsome."
전해주려다 말았다. (어깨 으쓱할까 봐 ㅎㅎ)
연주회를 보는 내내 나의 표정은 밝고 좋았으며
보고 싶었던 친구에게 장미 한 송이를 줄 때에도
내 마음이 행복했다. 내가 고른 식당에 맞춰주고
생각지 못한 향기 나는 선물을 주는 우아한 친구.
우리는 함께 식사하는 동안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아니, 내가 유독 많이 웃었다.
훌륭한 연주가 끝난 뒤 박수를 치는 순간에조차
내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고 절로 미소 지어졌다.
돌아오는 길 오랜만에 탄 지하철 끝자리에 착석.
저 멀리 빈자리가 있는데 굳이 내 옆 기둥 안쪽에
몸을 너무 많이 기대고 있던 누군가가 점점 몸을
거의 착석하듯 걸터앉기 시작했고 나는 오른팔을
편히 두지 못하게 되었다. 한 정류장을 지나갔다.
자세가 점점 더 내 쪽으로 오면 왔지 안 나아져서
참다가 조심히 말을 걸었다.
- 저, 실례지만 자리 좀 제대로..
고개를 돌려 나를 언뜻 보는 얼굴은 20 초반 무척
멀쩡하게 생긴 남성. 그런데 자세가 달라지지 않..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이게 대체 무슨 자세지....
어쩌자는 것일까.. 심지어 여기 임산부석인데......
- 자세 좀 바로 해 주시겠어요?
한동안 참다 단호하게 다시 말하는데 마치 못 본 척
하려는 듯 자세를 바꾸지 않고 내 쪽에 더 걸터앉는
것이었다. 침범의 압박을 느끼고 일어나야 하는가
고민하려던 찰나, 갑자기 내 좌측 여성이 팔을 뻗어
그 남자 등을 팍 쳤다. 아, 깜짝이야... (나도 놀람)
놀란 남자가 뒤를 돌자,
"여기 지금 불편해하시잖아요~! 네? 불편하게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사람을 불편하게 하면
안 되죠, 공공장소에서!"
" 아, 네.."
그런데 이 남자가 다시 앞을 보며 그대로 앉아있..
"이보세요!!"
여자분은 다시 그 남자를 쳤고.... ㅋㅋㅋㅋㅋㅋ
"거기는 앉는 자리가 아니잖아요. 앉는 데가 아닌데
앉아 있잖아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술에 좀 취해서..."
"술에 취했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죠.
다른 데로 가세요. 거기 있지 말고! 네?!"
"아.. 저 지금 내릴 거라.."
"내린다고요? 그래요, 그럼."
와.... 나는 왠지 쫄았다가(?) 너무 고마워서 옆을
조심히 보며 고개 숙이고 "아.. 감사합니다.." 하자,
"조금 더 강력하게! 말씀하셔도 될 것 같아요."
너무 고마워 모기만 한 소리로 세 번 고맙다 말했...
똑 부러지는 그녀.. 얼굴도 예쁜 호감형이야 아......
곧 다음 정거장에 하차하자, 그녀가 일어나서 내게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고 화이팅 표시를 하며 싱긋
웃고 내리는데 와... 반했... 와.... 대감동 ㅠㅠㅠㅠ
와................. 개설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혹시 나 임산부인 줄 알고 화이팅까지 해준 건가...
출산으로 보답해야 하는 건가(죄송합니다스미마셈)
친구들과 헤어지고 돌아오던 그 순간부터 왜인지
내면 깊은 어딘가에서부터 위축이 되어가던 나는,
아니 원래의 내 모습이 나를 점령해 가고 있었기에
어쩌지 못할 뻔한 그때, 일면식도 없던 작은 여성이
마치 '살아가려면 힘을 조금만 더 내 보세요!' 하듯
그렇게 나서서 도와주고 힘써준 것이 참 고마웠다.
하루, 아니 일주일간 너무 많은 생각과 해프닝 속
날 설레게 한 그녀까지 생각 속에 담겨 어두운 밤
터벅터벅 귀가하던 나의 발걸음은 유난히 느렸다.
그리고 예상했듯,
이튿날 이른 새벽잠을 설치며 깨어난 나의 마음은
점점 울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눈이 아프고 붓도록
오전부터 오후까지 울었다.
새벽에 온 그 메시지들을 보며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예쁜 말 같은 것 더는 하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무반응으로 답을 대신했다.
왜 우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고
안다 하여도 대책이 없다는 내 옛 글
그 문구가 떠올랐다. 난 여전하구나.
소리 없이 울 줄만 알던 나로부터
흐느끼는 소리가 귀에 들릴 만큼
울고, 울고, 울고, 또 눈물 흘렸다.
아무렴,
어제 많이 웃었으니
오늘 많이 우는구나.
"앞에서 많이 웃는 사람은 뒤에서 많이 운대"
많이 웃었던 대가를 치르듯 옛 친구의 한 마디가
여전히 자라지 못한 내 속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함께 웃으며 대화한 친구에게
당분간 연락 말자는 메시지를 보내고 밤을 새웠다.
더 잘할 수 없을 만큼의 선택을 해 낸 나는 오늘도
타협하지 않은 대가를 그렇게 많은 눈물로 채웠다.
그리도 울었는데 아직도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니
아직 울 날들이 더 남아있는가 보다.
나에게, 울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