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울 자격 따위는 없었다
"누나, 누나는 그냥 최대한 쉬다 나와. 이제부터는 내가 다 할게. 나랑 아버지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누나는 신경 쓰지 말고 몸 챙겨."
동생과 친척들이 나를 걱정했다.
"이제 너도 좀 먹어야지."
엄마가 살아있던 마지막 순간까지 줄곧 내가 주도했다면, 숨이 거두어진 순간부터는 한 발 물러서게 되었다. 연화장의 뜻도, 과정이나 절차도 잘 모른 채 보냈다. 일정을 동생이 아무리 상냥하게 설명해 주어도 전부 잊었다. 나중에는 미안해서 적었다. 아, 내 동생은 엄마가 떠나자 나에게 상냥해졌다. 동생의 와이프도.. 어쩌면 바라지도 않았지만, 엄마가 원하던 일은 엄마가 떠난 후에야 이루어진다.
장례식장에서의 나는 미친년처럼 통곡하지 않았고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기까지 했다. 아빠만 할까. 내 아버지는 적어도 내가 본 모든 문상객에게,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빨을 드러낸 채 웃으며 인사했다. 나도 절제하지만 사흘 내내 괴리감을 느꼈다. 꼭 저렇게 밝고 환한 모습이어야만 할까. 종종 매우 민망했다. 자식인 나마저 오해할 뻔했지만 그 이후 혼자 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나처럼.
나도 어쩔 때는 "여기 음식이 진짜 맛있어요, 아몬드랑 떡 식감까지 좋아요, 하나만 드셔보세요." 쾌활하게 말하다, 울먹이던 엄마 친구와 눈이 마주쳐 당황하기도 했다.
반면, 명랑하게 음식을 권할 때조차 나를 내내 측은하고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사람도 몇 있었다. 아주 가깝지는 않았는데 여기까지 와 주었고, 가리어진 나의 깊은 슬픔을 헤아리는 것 같은 눈으로 바라보던 '드문 사람들' 말이다. 내가 울지 않고 있는데 나 대신 울컥하던 그 사람을 보며, 말 못 할 감정이 스쳐갔다.
추모사를 읽을 때 빼고는, 감정을 다스릴 수 없거나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 격한 상태까지 나를 허용하지 않았다. 관에 누워 있던 아름다운 엄마를 볼 때에도, 최근까지 엄마를 괴롭게 한 사람이 엄마 손을 잡고 함부로 움직이자, 가지런한 자세에서 자꾸 흐느러지는 것을 보며 "닥치고 손 치우라" 소리쳐 쫓아내 버리고 싶었으나, 눈에 힘을 주고 감정을 억누르며, 꽉 잡지 말라, 엄마의 손을 다시 조심스럽게 모아 드렸다. 나도 아까워 꼭 잡지 못 할 그 손을 어디서 감히 산 사람 손 확 잡듯 하는가, 이 사람은 우리 엄마에게 마지막까지 함부로 대하는가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관 속의 엄마라도 지켜야 했으니 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엄마는 그 안에서마저 아름다워 빛이 났다. 실제로 그러했다. 게다가 우리 엄마는 떠나던 날에 가장 예쁜 옷을 입고 누워 계셨다. 아들 결혼식에 입었던 한복 - 남편에게 그 옷을 입혀달라 했기에 엄마는 단아하고 우아하며 고운 자태로 세상 편히 잠들어 있었다.
엄마를 눈에 담고 마음에 담고 사진으로 담느라 감정 따위 젖혀두고 엄마를 보아야 했다. 보아야만 했다. 이제 그녀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 숯팩을 아버지께 맡겼던 저녁, 올리브유를 빠트리는 바람에 검은 흔적이 남아버린 엄마의 가슴을 깨끗이 닦아줄 수 없던 나의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알고 보니 미용실 헤어디자이너에게는 "밥을 세 달째 못 먹고 있어요"라고 했으면서, 걱정할까 봐 정작 딸에게는 너무 늦게 말했던 우리 엄마. 그토록 뽀얗고 아기 같던 얼굴색이 황달로 변한 채 가야 하다니, 나의 마음은 온통 너덜너덜했다.
이렇게 되기까지 난 대체
어떤 미친년이었던 것일까,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눈물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비로소 이해했다.
울 자격 따위는 나에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