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큰 대형병원 근처에는 고시원이 많이 있다. 지방에서 치료가 어려운 병을 가진 환자와 가족들이 와서 지낼 수 있도록 지어진 것이었다. 환자와 가족들이 하루 이틀 먼저 와서 작은 고시원에서 지내다보니 근처 카페에는 항상 사람이 붐볐다. 문을 열고 카페로 들어갔다. 거동이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의뢰인인 호진이 어머니도 카페 한쪽 끝에서 책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진이 대학교 교재에요. 이제 보는 사람이 없어서 간간히 제가 보고 있어요. 개발자가 될 줄 알았는데...."
1년 전, 호진이의 어머니는 아들 사건을 의뢰차 처음 연락을 했다. 호진이가 벽에 부딪혀 엉덩이뼈가 골절된 사건이었다. 쉽지 않을거에요. 잘 봐주세요. 무난한 운동 장해건인줄 알았으나 쉽지 않을거라는 의뢰인의 말을 듣고 진단서를 자세히 보았다. 진단서에는 처음 보는 병명이 적혀있었다.
G 71.3 미토콘드리아 근병증
S22.9 흉추골절
I63.9 뇌경색증
G40.3 심근병증
......
23살의 진단서라고는 믿을 수 없는 10가지 넘는 병들에 대한 진단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여기서 핵심은 미토콘드리아 근병증이었다. DNA(미토콘드리아)에 문제가 있어 발생하는 유전병으로 발병 나이는 2세에서 40세 사이, 증상은 근육의 힘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호진이의 경우에는 스물 한살, 대학교 2학년부터 병이 발현하기 시작했다. 온 몸의 근육이 약해졌을 것이고, 그 여파는 뇌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표현력, 인지력, 주의력이 점점 떨어졌을 것이고, 그로 인해 불안함과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실제 인지평가 자료를 보니 인지, 기억, 주의력, 사회성이 6~7살 수준이라고 적혀있었다.
"뭔가.. 해볼 수 있는건 많은데, 참 힘들겠네요."
엄팀장이 말했다. 안물어봐도 의미를 알 수 있는 말이었다. 한 사람의 진료 기록을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을 보는 것과 같았다. 병의 형태나 원인 등은 생각보다 삶의 순간들이 모여 생기는 병들이 많았다. 직장인들의 디스크, 거북목 증상이 적힌 진단서를 보면 앉아있는 모습이나 걸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으며, 공장에서 일하다가 폐나 간에 암 증상을 보여서 온 의뢰인을 만나면, 먼지 많고 유해 물질이 널려있는 공장의 분위기가 상상되곤 했다. 하지만 이 아이의 삶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꿈 많던 아이와 화목했던 의뢰인 가정이 고등학교 과정 다 마치고 대학에 들어간 후 늦게 발현된 병에 의해 많은 부분이 깨졌으리라. 환자도 가족도 많은걸 포기했겠지.
보험사건으로만 본다면 진행할 건 많았다. 넘어져서 생긴 흉추골절에 대한 후유장해 청구를 하면 될 것이고, 뇌 관련 질환으로 진단금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가장 마지막으로 인지, 표현 능력 저하로 생긴 불편함을 일생생활장해 청구를 진행하면 될 것 같았다. 보험사에서는 선천적인 병이라고 해서 보험금을 안 줄 수도 있겠지만, 병의 발현이 매우 늦게 시작되었다는 점을 들어 다퉈볼만했다. 하나씩 천천히 해나가면 될 일이었다. 엄팀장과 서류를 면밀히 검토하고 며칠이 지나고 고객과 다시 연락이 닿았다.
"호진이가 벽에 부딪혀서 골절이 일어난 날, 제 마음속으로는 이제는 안되는구나 생각했어요."
그녀는 이제 자신이 많은걸 포기했다면서 틀림없이 매몰차고 나쁜 부모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시간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포기했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사실 처음에는 돌아올 줄 알았어요. 불과 몇달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정상이었고 젊었으니까. 기억상실증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처럼 특정 기억을 주입시키면 호진이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래! 정말 좋았고 원했던 기억을 다시 보여준다면!! 그래서 호진이 대학교에 같이 가보기도 하고, 친했던 친구들을 데려오기도 해봤어요. 호진이가 좋아했던 게임을 보여주기도 하고. 변하는게 없더라고요. 오히려 악화됐죠. 오래 걸어다니면 힘들어하고 헉헉거리고, 표현이나 단어를 말하지 못해서 대화도 자주 끊기고. 그러다 이 사단이 났네요.
처음에는 속수무책이었다고 했다. 의뢰인은 호진이의 언어능력과 인지능력이 하루하루 나빠지는 것을 보며 이유를 알지 못해 황급히 병원을 찾았지만, 제대로된 병을 찾지 못해 돌고돌아 서울의 큰 대형병원에서 호진이의 진단명을 알게 되고는 더 크게 좌절했다. 미토코리아 근병증은 모계 유전이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병이 제 핏줄 때문이라니... 매일 밤마다 나 때문이라는 생각에 잠을 이룰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더 제가 고쳐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끊임없이 그 원인에 대해 알아내려고 애쓴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서 말이다. 하지만, 근원이 불가항력적임을 깨닫는 순간 슬퍼하고 더 크게 좌절을 느낀다. 의뢰인의 자책은 전화 통화하기 전부터 알 수 있었다. 진단서 안에는 보호자 심리 검사 결과지도 있었고, [벌을 받고 있다. 자괴감과 죄책감에 매일 매일이 우울하고 불안하다.] 라는 평가지를 봤기 때문이었다.
두달 간 상해후유장해(흉추 골절 관련) 보험금을 받기 위해 보험사와 의뢰인과 소통했다. 비교적 큰 사건임에도 의뢰인과 업무 진행은 전화로만 이루어졌다. 서류상으로도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기도 했고, 아이의 질병이 너무나 희귀한 병이었고, 무엇보다 의뢰인의 슬픔이 너무 깊었다. 보통 조사 한두번은 꼭 나오는 보험사 직원조차 환자의 의뢰인과 전화하고 서류로 가늠해보겠다고 이야기했으니 말 다 했다. 일사천리란 이럴때 쓰는건가.
의뢰인은 고맙고 연락을 주겠다 라는 말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아니다. 애초에 본 적이 없으니 사라졌다는 표현보다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라는 표현이 맞을것이다. 의뢰인의 상황과 다른 진단에 대한 보험금 청구를 진행할껀지 종종 궁금했으나 연락은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돈보다는 마음이 단단해질때까지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알기 때문이었다. 힘든 상황을 일단 극복하고 보험금을 청구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기 때문이었다.
"연락이 없길래 저는 진행을 안하거나 다른 일이 있는 줄 알았죠. 다행이에요."
의뢰인으로부터 십개월만의 연락이 왔다. 마침 병원 진료를 잡아놨으니 말하고 인지하는 능력의 장해평가를 하자는 것이었다.
"육개월전에 휴지기가 왔어요. 의사 선생님 말로는 운이 좋으면 이 상태로 오래 갈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때를 기억하려고 많이 보내다보니 지금이더라고요. 병원 가는 김에 연락드렸죠."
옆테이블에서는 요양병원을 알아보는 가족이 열심히 인터넷을 뒤지며 정보를 찾고 있었다. 하루에 얼마정도 들어가는지, 셔틀버스는 있는지.. 앞 테이블에서는 보험 설계사와 예비 환자간의 모종의 공모(?)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 들어두면 괜찮습니다. 나만 믿고 따라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보험 설계사. 흠.. 걸리면 큰일날텐데. 카페 공간이 환자와 가족, 보험설계사, 손해사정사가 엉켜있는 하나의 커뮤니티 같았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많다는걸 서로 확인하자 안정감이 들었다. 의뢰인과 우리는 예행연습을 했다. 주치의에게 소견서에 꼭 적어달라고 해야할 말과 하지말아야할 말을 알려줬다. 이 카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잘됐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우리는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의 사람들을 그룹화해서 보려는 경향이 있다. 마치 유럽이나 미국인들이 한, 중, 일 사람을 같게 생각한다던가, 우리나라는 아프리카의 다양한 나라의 사람을 한 대륙의 동일한 묶음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세밀함은 공통점 뒤에 보이기 시작한다. 나도 그랬다. 23살의 호진이를, 진단서에 나와있는 글로만 판단했다. 6~7살의 지능을 가진 성인. 말아톤의 주인공이라던가 기타 다른 드라마나 영화로 봤던 캐릭터처럼 말이다.
호진이는 일단 이해가 빨랐다. 어휘, 표현, 분위기에 대한 습득이 빨라 이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금방 눈치챘다. 보험사에 제출하기 위해 영상 촬영을 하자 자연스러우면서도 힘든 동작을 알아서 잘 보여줬다. 이야기도 곧잘 통했다. 산만함이 있어 한가지 주제로 길게 이야기하는걸 어려워했고, 단어의 표현에는 한계가 있었다. 갑자기 딴짓을 하거나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는 행동도 보였다.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더라고요."
혼자 상담을 받으러갈때 의뢰인에게 이런 내 의견을 전하자 일상이라는 듯한 말이 돌아왔다.
"저도 그랬어요. '장애'라는 단어가 멀게만 느껴졌을 때, 뭔가 자폐가 있거나 발달장애가 있는 친구들은 속된말로 좀 모자라게 봤죠. 실제로 거의 볼일도 없으니까 지하철 같은 사람 많은 곳에서 한 두명 보면 저 아이들은 다 저렇구나 생각했어요.".
의사 선생님 소개로 저와 비슷한 상황의 모임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많은 아이와 보호자를 보면서 제가 조금 변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장애라는게 모든 부분이 뒤쳐진다는 말은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더 특출난 부분도 있고. 순수할때도 있고. 괜찮은 부분도 많더라고요. 호진이도 오히려 더 좋아진 부분도 있어요. 최근 육개월은 저도 좀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걸 깨닫는 시간이었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다들 음지에 숨어있는건지.
아무래도 우리의 시선과 생각 때문이 아닐까요. 나도 모르게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길거리에서 불편했다고 느꼈던 생각이 떠올랐다.
"저는 그래서 이제 장애라는 말을 잘 안쓰려고 해요. 말 자체에 전반적인 평가가 깔려있는거 같아서요. 좋은 말만 하고 살기에도 바쁜데. 의사 선생님도 특정 부분을 콕 찝어서 저하라고 이야기하지 전반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더라고요."
단어에는 힘이 있다. 어떤 단어는 우리의 떠도는 생각을 잡아주는걸 넘어 그룹화하고 편견을 갖게 한다. 나는 그런 편견들이 질병을 상징하는 단어에 많다고 생각한다. 에이즈, 장애, 자폐 등 수많은 정신질환에 대한 단어들이 머리속에 지나간다. SNS와 티비 속에서 우리의 생각은 견고해질 수박에 없다. 나 또한 결정장애, 발작버튼, 암 걸린다 등 다양한 단어를 나를 자책하는 목적으로 쓰기도 했다. 목적 자체에 이미 그 단어들은 무언가 부족하거나 짜증날때 쓴다는 무의식을 갖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한발자국 옆에 서서 그러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우리와 비슷한 점도 오히려 더 나은점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에는 안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모르는 일 투성이었다.
"호진이가 생각보다 멀쩡해서 보험사에서 장해율을 높게 책정 안할수도 있어요. 최대한 만나지 말고 서류로만 청구하는 방향으로 진행하시죠."
"아 참.. 그리고 저도 좋은 말만 사용해야겠어요. 오늘 만나서 감사드려요. 잘 진행하겠습니다."
주치의 소견서를 들고 나와 엄팀장은 병원을 빠져나왔다. 우리는 문을 빠져나오다 동시에 뒤돌아보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이제 남은건 전화로만 진행하면 되는 일이었다. 고작 의뢰인가 이틀간의 만남이었지만 나는 이미 알 수 있었다. 어떤 날은 365일 일상의 루틴보다 강렬하게 기억되고 잊혀지지 않을 것임을. 오늘도 역시나, 나의 편견과 무지가 다양한 세상의 조각들로 채워진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