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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라 그래

상처엔 : 관심법(X) 무관심법(O)

개그맨 박미선씨는 가수 양희은씨에게 속을 털어놓을 때, 항상 해주는 이 말이 너무 좋다고 했다. 


"그러라 그래"


생각해보니 그녀의 두 유행어 <그럴수 있어><그러라 그래>는 관계 속 나를 보호하는 대우주적 솔루션이었다. 




직장 관련 별별 스펙터클 대환장 사건사고가 판치는 세상에서 사실 이 이야기는 사소해 미칠 지경으로 새발의 피도 아닌 점에 유의하라. 다만 연인이건 친구건 빤하게 그러하듯 관계의 시작과 끝은 극히 사소한 사건으로부터 기인한다. 


바쁨의 절정에 이르던 어느 날,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뜨거운 업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A는 특정한 업무의 올거나이저를 자청한 B에게 내가 맡은 관련 작업의 진도에 관해 물어봤고, B가 내게 자료를 요청하자 A가 원하는 자료의 목적이 무어냐고 물었다. 명쾌하게 답변이 없자 나는 A에게 직접 한번 물어보고 전달할 자료를 정교화하여 전달하겠다고 했더니. 전체방에서 B 왈 "그렇게 내 역할을 침해하면 당황스럽다". 

그렇게 난 피해자가 되었다! (부연하자면, 그때 이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은 '모두의 번거로운 커뮤니케이션을 줄이자'가 컸다. 오해의 소지는 다분했다)


입사 후 스스로가 어느 부서의 사람인지 경계나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은 뉴 비즈 조직에서 동시다발 여러 페르소나가 되어야 했다. 이런 애티튜드는 애자일을 추구하는 조직의 최고 미덕이었다(aka #니일내일이어디있겠어). B의 찌르는 말을 듣고 나서 생각했다. 우리 조직에서 개인의 '역할'이란 모두가 꼭 지켜야하는 규율이나 윤리였던가, B가 주연으로 개인기가 펼치고 있는 메인 스테이지에서 내가 중요한 '권리'를 <침해>한것인가, 서'의무'를 <조력>한 것인가. 천사의 얼굴을 한 B가 내게 <역할>에 대해 재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며 전체 앞땅을 깐 이유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1) 전화나 개인메신저의 방법도 있을테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건넨 이유는 무엇인가.

(2) 정말 단순한 오해로부터 발생한 분노인가.

(3) 스스로의 역할과 권위에 갖던 불만을 공식적으로 나를 통해 분풀이를 하고싶었던 것인가? 

(4) 나는 당신의 분노를 해갈하는 대상으로 그렇게 만만한가? 

(A) 난 당신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1~4 후, A의 감정이 들며 머릿속이 복잡해진 나는 무어라 대답할지 감히 판단이 서질 않아 답장을 하지 않았다. 별 일 없다는 듯 무수한 업무 대화가 이후 메신저를 뒤덮었다. 뻔한 스토리로 전개되는 드라마의 예측가능한 배경음악처럼 이런 일들은 사소하게 지나가고 또 잊혀지는 일인거다. 내 감정만 사소하지 않은거지.


일을 마친 뒤 전화를 걸었다. B는 새초롬히 팀 안의 정확한 역할 정립이 필요하고, 모두가 알아야 할 것 같아 그렇게 했다고 한다. 내 입장을 설명하며 '내가 무언가를 침해했다면 미안하다' 고 했다. 사실 미안했었나? 다시 생각해도 내가 <미안>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전쟁같은 하루하루의 업무 속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괜한 소모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말자. 이 문제의 해결은 <미안합니다>를 말하는 것이다.' 이 뿐이었다.


일이 터진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마치 예전의 관계처럼 돌아간 듯 보이지만 사실 나는 B를 이전처럼 대하는게 힘들다. 돕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마치 전우애와 같은 따뜻한 마음이 가득했던 이전과 달리 그 하루가 지난 뒤 많은 것이 달라졌다. 역사적으로 질투와 배신은 희노애락 그 어느 감정보다 동기부여를 하는 가장 큰 요소라던데, 내 안에 자라난 배신감은 일이나 사람을 보는 본질의 마음을 미꾸라지처럼 흐려둔다. 상처는 배신감을 낳았고 나는 그 안에 매몰됐다. 스스로 자부하고 추구하는 공감과 용서, 융통의 마음 안에 자꾸 악마가 깨어나는것을 본다. 


못된 마음을 먹는 스스로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움튼 내 감정을 쉬이 대할 일은 아니다. 상대가 진실된 마음으로 들어와 상처에 후시딘을 발라줄 것을 기대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지키는 법은 선악의 모든 가면을 던져버리고 나를 존중하지 않은 누군가가 있건 없건 무감각하게 밥상 위에 차려야 할 밥과 반찬을 올리는 일일 뿐이다. 


아까운 내 감정들을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을 이를 위해 사용하지 말자. 

그저 훌훌 흘려 비워내고, 사랑하고 좋아하는 이들에게 그득그득 선물해주자. 그러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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