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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만 둬도 될까요?

저의 올해 신년 목표는 뜨거운 안녕이요. 회사랑!

나는 중요한 것을 결정하는 데 매우 막(?)스럽다. 상황을 조각으로 쪼개고 그 가치를 비교해가며 중립적인 입장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즉흥적이고 감정적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경솔한 인간으로 30년을 자랐다. 그런 신중無 생각無 나는, 최근 인생의 난제에 마주쳤다. 


"회사야. 우리 지금 안 괜찮지?"


"부족한 널 맞아 준 첫 직장. 흔치 않은 좋은 사람들, 작은 능력에 대한 인정, 그리고 사원급에 나쁘지 않은 봉급. 그래도 우리 꽤 좋았잖아?"

평소답게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한 이유는 권태로운 연인 관계를 놓고 번민하는 것과 비슷하여, 작금의 시간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나 과거의 좋은 것들이 발목을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또 경제적 불안정, 정해지지 않은 일상과 소속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나는 내려놓은 이후의 불안정함을 부딪힐 수 있는 단단한 줄기를 과연 갖고 있을까? 일을 그만 둔 후 어려운 순간이 다가왔을 때, 퇴사를 쉽게 결정한 나 스스로를 '그럼직 했다'고 납득할 수 있을까?


3년의 흔적이 깃든 이 곳에 대한 회의로 몸부림치는 이유에 대해 좀 더 명확해질 필요가 있었다. 회사에 대해 복합적인 그 문제를 정확하게 정의 내리고 넘어가야만, 나는 스스로의 선택을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후회 없이 맞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쉽게 얘기할 수 있는 한 마디, '밥벌이의 어려움'으로 치부할 수 있겠다만 심플하게 '아 대한민국 개미 인생 모두 그렇지'라고 은글슬쩍 무리에 껴 넘어가기에는 나는 퇴사를 결정한 때의 나를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보편적인 이유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참아내지 못한 허들이 무엇인가를 나는 스스로의 알고리즘을 활용해 알아내야만 했다. 회사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이룬 조각들은 무엇이고 과연 그것이 '커리어'와 '회사 생활'에 대해 판단하게 하는 중심적인 가치인지, 그리고 '좋은 것'을 이길 수 있는지. 


"야근이 너무 힘들다, 비합리적인 업무 분배 구조가 불만스럽다, 당장 주어진 일을 더 빨리, 더 정확하게 기계적으로 쳐내야 하는 동기 부여란 없는 일상, 운영에 대해 전문성이 결여된 의사 결정, 급여의 불안정성"


긍정적으로 여기는 것들이 일과 회사를 판단하는 데 주변적인 가치라면, 불만스럽게 여기는 가치들은 회사를 선택하거나 판단하는 데 중심적인 가치라는 이 절망적인 아이러니를 만났다. 그래, 이제 좀 나를 설득할 수 있겠구나.


그러나 다음 미션이 남았어요. "경단녀" "결혼은 언제해" "돈 좀 모았어?"


지인들에게 마음을 이야기하면 돌아오는 대답 중 80%는 같았다. '하고싶은 게 없으면 이직 하지 마' '다른 직장으로 환승해' 지금의 회사를 그만 두기 위해서는 꼭 하고싶은 게 있어야 하고, 두려움을 좀 덜어내기 위해서는 '안전빵'인 다음 스텝이 꼭 필요한걸까?


나는 하고 싶은게 명확하지는 않다만 '그쪽 업계가 좀 재밌어보여'라던지, '나 우선 놀려고'라는 답변을 건네고 싶었다. 당분간 경제 생활 없이 버틸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있고, '서른살 백수 미혼녀'가 할 수 있는 수만가지 활동을 즐기며 나의 또 다른 꽃망울을 찾고 싶었던건데, 과반수가 인정하는 답변이 아니면 이것은 불완전한 이유가 되는건가. 많은 고민 끝에 건넨 나의 퇴사 계획에 나의 주변인들은 나의 불안에 기름을 들이 부었다. 


"나 진짜 퇴사하고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여럿 '퇴사 성공자' 들의 말에 흔들려 스스로를 결정하지 않도록 나는 약소하게 마음을 준비하기로 했다.


'없어도 살 수 있다'를 아는 것, 
그런 내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였습니다. 
<퇴사하겠습니다> 이나가키 에미코, 2017


결정에 정답이란 없(을거)다.

 베짱이 생활 후 개미 복귀를 준비 하며 나는 '아 괜히 그만뒀어'를 외치는 찌질이같은 생각을 할 지도 모르지. 

다만 더 이상 일에 대한 문제 의식을 외면하고 몇몇 소소한 좋은 면면들로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세상 찌질한 이 짓으로부터 이별을 고해보자. 퇴사 이후의 시간들 : 소속에서 나아가 개인으로 존재해야 하는 불안정, 경제적 불안정, 누군가 정해지지 않아 내가 꾸려나가야만 하는 백지같은 일상-이 불안하긴 하겠지만, 언젠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 이 세계에 깊숙히 박힌 회의감을 벗고 은근한 노스탤지어가 들 때 즈음 웃으며 돌아와 다시 회색 의자에 앉을 수 있는 튼튼한 추억을 만들어 돌아와야지. 


유명한 짤처럼 '하고 싶은건 없고 그냥 놀고 싶어요'가 아니라, '하고 싶은건 많고 생산적으로 놀고 싶어요'를 목표로, 소속이 아닌 나에게 충실한 하루 하루를 만들 한 해가 되길.


모르는 번호의 전화를 받을 때 습관이 된 '직장인 콜비지' - <안녕하세요 뭔회사 누구입니다>가 아니라


<안녕하세요,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입니다> 를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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