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살 길을 찾았을 뿐인데 왜 경력직 싸그리 욕하고그래
모든 사건의 시작과 끝은 진하게 남기 마련이다. 지난 사랑을 처음 본 순간의 짜릿한 기억, 서툴고 설익은 연애에 아름답지 못한 헤어짐. 시간이 흐르면 그 시기엔 죽을만큼 힘들던 모든 삼라만상이 뭉툭한 여운 속으로 묻히고, 좋았던 기억만 백사장의 반짝임처럼 남게 된다. 모든 과거란 그렇다.
퇴사를 앞두고 2주 남짓 남았을 때, 동료들과 담배 타임을 갖던 중 문득 이런 말을 들었다.
이제 회사에서 경력직 안 뽑겠대. 다들 금방 나간다나 뭐라나.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미 나는 적을 떠날 회사가 경력직을 뽑든 말든 내가 원망스럽든 뭐든 무슨 상관일 터. 집에 와 맥주를 들이키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 웃길 일이다(마냥 그러거나 말거나 하기엔 나는 꽤 찌질하다). 익숙함을 버릴 수 있는 용기는 기본 탑재, 뜨거운 재취업전선을 뚫고 이 둥지의 미래를 확신해 찾아온 경력직이 왜 떠나는가를 고민해보면 어쩌면 HR의 문제가 뭐였는지 짚을 수 있는 좋은 계기일텐데 솔루션이 고작 [경력직 뽑지 마]라니. 이전 직장의 HR부서에는 외부 전문가가 아니라 내부 직원들이 순환 직무로 선발되다보니 아무래도 전문성의 문제인걸까, 아니면 10년이 채 안되는 HR부서의 역량의 문제인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 부서의 성과(=인력관리)를 해친 아~주 그냥 간사하고 못된 퇴사 경력직들에 대한 원망의 조치인걸까. 아니면 진짜 경력직을 안 뽑으면 내부 사정에 진짜 도움이 될런가.
여느 회사건 분명 연륜과 업력을 바탕으로 제 역할을 다 하는 존경할만한 고연차 인재들도 부지기수고, 어쩌면 그렇게 좋은 선배 아래에서 지지고 볶으며 오래 한 회사를 다니는 건 여러 직장인들의 꿈일수도 있겠다. 다만, 독과점 혹은 초격차의 혁신적 기술의 제품을 판매하는 회사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회사는 고인물이 되는 순간 시장에서 도태될 수 밖에 없음이라.
여러 회사를 겪으며 체득한 노하우를 기반으로 회사 내부적으로 지니지 못한 dna를 옮겨줄 능력있는 경력 직원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 물론 경력직 용병들이 필요한 타이밍은 각 사업체의 비즈니스에 따라 모두 다르겠다만, 기존의 익숙한 루틴에서 벗어나 새로운 스킬을 받아들이자고 공론화할 수 있는 리더와, 그리고 그 스킬을 늦지 않게 바로 실무에 옮겨줄 경력직 대리과장급이 있다면 여느 비즈니스의 타이밍이든 큰 도움이 될 수 밖에 없다. 정년퇴직이란 말이 점점 무색해지는 시대에 회사가 더 잘 알아야 하는 채용의 스킬일 것.
경력직은 더 나은 회사를 찾고, 회사는 이용할 가치가 높은 경력직들을 찾기 마련이다. 자본주의의 섭리다. 얼마 전 모 기업의 면접을 보러 갔다. 퐈려한 경력기술서와 포트폴리오를 내두고 나는야 경력직이니 주요 업무와 성과에 대해 집중 포격하겠지 생각하며 잊혀진 프로젝트들의 데이터들을 달달 외워갔다. 그러나 왠걸. 스트레스 해소법과 사내 동료들과의 관계 등 인성 관련 질문만 들입다 질문했다.
마지막 할 말이 없냐는 말에 성과나 업무 내용은 궁금하지 않으시냐 물었더니, [성과는 기술서에 명료하게 쓰여있으니 그만이다. 회사의 업무 강도가 높으니 회복 탄력성이 높고 사교적인 이들인지가 중요하다] 란다. 회사에 경력직 비율이 꽤나 높은 편이라 이 조직으로 서서히 스며들 수 있게 다양한 경력직 친화 프로그램들이 있다는 짤막한 어필도 덧붙였다. 영리한 회사다.
회사를 다니는 내내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좋다며 들어가 몇 년을 지지고 볶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지만 이 곳을 떠난 뒤 백사장에 남은 기억은 동료들과 새벽 매장 오픈 준비현장에 나가 무거운 짐을 버쩍버쩍 들어 옮기고 아침 동틀 때 귀가했던 일, 우스꽝스러운 회식 에피소드,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채 진행한 행사에서 구멍을 막기 위해 두꺼비마냥 여기저기 투입되던 동료들과의 아찔한 기억 등등, 다 사람이다. 돌아보면 꽤 재밌던 회사 [생활]이었다. 그럼, 회사가 어땠냐며 묻는다면 한 문장으로 이렇다. [다들 경력직을 뽑아대니 우리도 뽑고싶은데, 이들이 경력직값 하도록 어떻게 굴려야 할 지 소프트웨어가 없음]
지난 조직에 대해 머릿속에 남은 잔상은 어쩌면 담배연기 속에서 흘러온 HR 담당자의 말이 아닐런가. "경력직 뽑지마 이제"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