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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삼삼 Mar 17. 2023

북한 핵 개발의 시작

feat.내 머리 위의 폭탄

 우리는 왜 북핵 협상 과정을 굳이 알아야 할까요. 온갖 매체에서 항상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그 뉴스를, 왜 귀중한 시간을 할애하며 봐야하는 걸까요. 아마 이런 저런 이유가 떠오르실텐데, 제 생각은 단순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머리 위에 북핵을 이고 있기 때문이죠. 지금 우리 머리 위에 시한폭탄이 있는데, 째깍째깍 시간이 흘러간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럼 당연히 폭탄을 해체해줄 담당자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지 않을까요? 머리 위의 폭탄을 잘 해체하고 있는지, 아니면 허송세월하면서 비용만 축내고 있는지를 잘 봐둬야, 못미더운 담당자 말고 다른 담당자로 바꿔달란 요구라도 할 수 있을테니까요.

 

 그래서 이번에는 상식으로 알아두면 좋을, 북핵 문제를 시리즈로 설명드리려 합니다.  과정을 아신다면 아마 앞으로 북한이 각종 도발을 하는 것들이 어떤 맥락에서 이뤄지는 것인지, 큰 줄기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실 거라 생각합니다. 사실 외교 이슈는 정치 성향에 따라 사안의 성격완전히 달리 보이기도 하는데요.  글에서는 최대한 팩트 위주로, 그리고 중립적으로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북핵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그 배경과 외교적 해결 노력의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첫 단추부터 보수 혹은 진보의 프레임에 갇혀 서술되면, 결국 본질을 이해하는 마지막 단추조차 끼우기 어려워질 테니까요.


 북핵 문제가 처음 국제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1989년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실제 핵 개발에 나선 것은 무려 70여 년 전의 일입니다. 6·25 전쟁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요. 전쟁을 전후한 그 척박한 시기에도 북한이 핵 기술 개발에 나설 수 있었던 데는 환경적 요인이 컸습니다. 바로 북한의 어마어마한 우라늄 매장량 덕분이었. 북한은 1947년부터 소련 전문가의 도움으로 우라늄 광산에 대해 탐측을 시작했습니다. 전쟁 직전인 1949년~1950년부터는 대동, 신진과 같은 광산에서 대규모 우라늄 채취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1964년에는 전국적으로 우라늄광 조사 작업을 벌여서 채취가 가능한 매장량이 400만 톤에 이른다는 사실을 확인습니다. 좀 오래된 자료이긴 합니다만, 1980년 북한 발표에 따르면 북한의 우라늄 전체 매장량은 2천6백만 톤에 달한다고 합니다. 물론 이 매장량이 전체 다 활용 가능한 것은 아니고요. 이 가운데 경제성이 있는 우라늄 채굴 가능량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400만 톤으로 평가됩니다. 이 규모는 전세계가 50년 동안 쓸 수 있는 양이라고 합니다. 정말 어마어마하죠. 게다가 우라늄과 더불어 핵무기 제조에 중요한 또 다른 광물인 흑연 매장량도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본과 기술만 있으면, 얼마든지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천혜의 자원(?)'을 갖고 있는 셈이죠.  


 사실 핵무기 제조 과정이나, 핵에너지의 생산 공정은 똑같기 때문에 겉으로 봐서는 특정 나라가 핵무기를 만드는 중인지 아니면 민수용으로 쓰는 핵에너지를 만들려고 하는건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어느 나라든 처음 핵 기술을 개발할 때는 "우리는 평화적으로 원자력을 이용하려고 기술 개발 중이야"라고 설명하곤 합니다. 이 말의 진실 여부는 나중에야 드러나니, 핵 개발국으로서는 일단 다른 나라들한테 대충 둘러댈 여지가 있는 것이죠. 물론, 북한도 그렇게 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핵무기 개발을 위해서 은밀하게 노력하면서, 외부적으로는 연막전술을 펼쳤어요. 바로 다음 단락에서 서술할, 다소 복잡해보이는 과정은 바로 북한이 국제사회의 의심을 받지 않으면서 은밀하게 추진해온 핵 개발 과정입니다. 머리 아프신 분은 괄호 안의 복잡한 내용은 건너 뛰고, 그 다음 단락부터 읽으시면 됩니다.


 (6·25 전쟁 직후인 1954년 북한은 인민군 내에 '핵무기 방위부문'을 설치했습니다. 이듬해에는 과학원에 '원자 및 핵물리학 연구소'를 설치했지요. 1956년에는 소련과 ① 연합 핵 연구소 조직에 관한 협정, ②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정을 각각 체결하고, 물리학자 30여 명을 소련의 두브나 핵 연구소에 파견했습니다. 이 연구소는 소련 최대의 핵실험실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먼 훗날 소련과의 연구협력이 중단될 때까지 30여 년간 모두 250여 명의 북한 과학자들이 거쳐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1962년 영변 원자력 연구소를 설립했고, 이듬해엔 소련에서 2MWe(메가와트)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한 후 1967년부터 이 원자로를 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원자력법을 제정한 당해연도인 1974년에 국제원자력기구, IAEA에 가입하게 됩니다.)

 

 북한은 적어도 1980년대 이전까지는 국제사회로부터 핵무장 의혹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앞서 말씀드렸듯 국제사회를 향한 연막전술 덕분이었습니다. 1974년에 국제원자력기구, IAEA에 들어간 후, 북한은 그들 나름대로 국제사회의 요구 기준을 충족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989년부터 2년간 IAEA의 이사국 담당하기도 했고, 1985년에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함으로써 자신들의 핵 개발이 평화적 목적이라는 걸 강조했거든요. 물론, 결과적으로는 눈속임이었지만요.


 평화적으로 보였던 북한의 핵 개발에 '이상한 낌새'가 포착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을 전후한 시점이었습니다. 핵탄두를 실어나를 수 있는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북한은 1983년부터 영변 핵시설 내부의 모래밭에서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고온폭발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85년에는 영변의 5MWe(메가와트) 실험용 원자로 옆에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인 '방사화학실험실'을 건설한 후 1986년 9월 이 원자로를 처음 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결정적으로는 1989년 3월에 최초로 핵연료봉을 추출하고 재처리한 것으로 훗날 파악됐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평화적인 핵에너지 개발로 보기 어려운 행보였지요. 그러자 미국이 나섰습니다. 북한을 A급 감시지역으로 설정하고 정찰 활동을 강화시키던 미국은 1989년 7월 영변에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이 있다는 걸 파악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1989년 9월에는 미국의 판단을 증명하는 위성 사진이 공개되죠. 바로 프랑스의 상업용 위성인 '스팟 2호 (SPOT: Satelite Probatoire d’ Observation de la Terre)'가 촬영한 영변 핵시설의 사진이었습니다. 이 사진은 결국 영변의 핵시설이 평화적 목적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 핵무기 개발을 위한 것임을 온 세상에 공표하는 첫 증거가 되었습니다. 또한 모든 국제사회의 시선이, 북한의 영변에 쏠리게 된 첫 계기이자 수많은 외교적 타결 시도의 첫 시작점이 되기도 했지요. 


 



※ 참고 : 『북한 핵정책의 기원에 관한 연구 : 핵 잠재력 확보전략을 중심으로』, 정현숙, 동국대학교, 2019.

[커버스토리] 북핵 위기의 한반도 : "북한 핵개발의 역사", 이춘근, 주간조선, 2013/3/11.

『북핵일지 1955-2009』, 조민·김진하, 통일연구원, 2009/12.  

『북한의 국방과학기술과 핵문제』, 김철환, 서울: 통일원, 1990.

"북한 핵문제의 과학기술적 이해," 이춘근,『정책연구』, 정책자료 2003-09(2003)

"북한, 핵 기술·인력 어떻게 만들어졌나," 이상수 기자, 한겨레, 2006/10/14.

"[이우탁의 탁견] 김정은 '컴백장소' 인비료공장과 우라늄", 이우탁 기자, 연합뉴스, 2020/5/6.

 <성 김 과장이 들고온 '핵 보따리' 내용은>, 이우탁 기자, 연합뉴스, 2008/5/10.  

                    


※ 대문 사진 참고 : 2008년 6월 27일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과시하기 위해 영변 핵시설의 냉각탑을 폭파하는 모습. 연합뉴스, 20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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