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정승의 유명한 일화가 있죠. 하인들이 서로 다투다가, 차례로 황희 정승에게 찾아가 "내가 옳다"고 주장하자 황희 정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조카가 "아니, 왜 바른 판가름을 해주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황희 정승은 조카에게도 이렇게 말했다죠. "그래. 네 말도 맞다." 모두가 서로를 겨냥해 '틀렸다'고 지적하는데, 황희 정승은 그저 그 지적들이 모두 맞다고 한 겁니다.
일견, 밑도 끝도 없이 무책임한 답변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 훌륭하다는 황희 정승은 왜 그렇게 답했을까요? 저는 협상의 관점에서, 황희 정승이 문제를 풀어갈 단초를 줬다고 봅니다. 하인들 입장에선 권위있는 대감의 말을 듣고, '어쩌면 쟤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며 적어도 한 번쯤 역지사지를 해볼 수 있을 테니까요. 협상이라는 것은 서로의 입장차를 좁히기 위한 과정인데,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황희 정승은 하인들에게 꼭 필요한 걸 건네준 셈이 되지요. '내 말만 맞는 줄 알았는데, 쟤 말에도 일리가 있긴 있네' 하는 그 생각의 실마리를 말입니다.
북핵 문제를 풀어가는 협상 과정도 비슷합니다. 30년 넘게 꽁꽁 묶인 북핵 문제의 실타래를 풀려면 실마리를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죠. 그 실마리는 바로 협상 당사자들간의 주장에서 서로 '일리있다'고 판단되는 공통 분모입니다. 서로 한치 양보도 없이 대치하는 듯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타결 소식을 전해온 합의들, 그것들은 바로 과거에 서로가 실마리를 찾아냈단 증거들입니다. 합의문이라는 것은 서로 '쟤 말도 일리가 있네' 싶으니까, 서로 승인한 결과물인 거지요. 과거의 공통 분모들이면서도 동시에 미래의 공통분모를 찾아내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이런 합의들은 지난 30여 년간 단 몇 차례만 존재했습니다. (물론, 통일백서에 따르면 남북간의 합의는 2021년까지 258건 있었지만, 북한 핵문제를 중심으로 다룬 굵직한 합의만 보자면 그렇습니다.) 북한 핵문제와 관련한 합의는 '당사자'들이 누구냐에 따라서도 종류를 나눌 수 있는데요. 일단 남북간 주요 합의로는,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과 6·15 남북 공동 선언,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선언),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북간 주요 합의로는 미·북 공동성명, 제네바 합의, 미북 공동 코뮤니케, 2.29 미·북합의, 2018 미·북 정상회담 공동성명이 있었고요. 중국과 러시아까지 포함됐던 6자회담 합의로는,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 10.3 합의가 있었습니다.
이들 합의, 특히 북한이 미국과 합의했던 내용들을 보면, 북한이 원하는 것에는 일관된 공통점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미·북 관계의 정상화, 다른 하나는 경제적 지원이죠. 합의 시기마다 표현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북한은 30여 년간 일관되게 이 두 가지를 원해왔습니다. 초기에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위협도 하지 않는다', '테러지원국에서 북한을 해제시키기 위한 과정을 시작한다' 정도로만 합의를 봤지만, 제네바 합의에선 '쌍방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한다거나 '(상황이) 진전되면 양국 관계를 대사급으로까지 격상시킨다'고까지 합의를 봤습니다. 정치적으로 완전한 관계 정상화를 지향한 것이지요. 가장 최근인 2018년 싱가포르 공동성명에서도 '새로운 미·북 관계의 수립'이라는 표기로 이런 의지를 명확히 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경제적 지원에 대한 북한의 희망 사항도, 시기마다 표현은 조금씩 달랐지만 본류는 같았습니다. 제네바 합의에선,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경수로 2기를 제공 받고 경수로가 완공될 때까지 연간 50만 톤의 중유를 받기로 합의를 봤고요. 2.13 합의에선, 미국 제재로 묶인 방코델타아시아의 북한 자금을 돌려받고 중유 100만 톤 상당의 경제 지원을 받기로 약속 받았습니다. 각종 제재로 북한의 사정이 악화됐던 2.29 합의에선, '24만 톤의 영양식품을 제공하고 추가적인 식량 지원 노력'과 동시에 '미국의 대북 제재가 민수 분야를 겨냥하지 않는다'는 점도 확인 받았습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제재가 역대 가장 강력했던 2017년 이후인 2019년에는 북한이 대북 제재의 해제를 요구했다는 사실이 북한과 미국, 양측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지요. 결국 북한이 원하는 것은 기승전 '경제' 인 셈입니다.
이런 과거 합의의 '실마리'들이 우리에게 주는 함의는 언젠가 있을지 모를 북핵 협상에서 '북한이 최소한 이 정도는 요구할 걸 알고 대처하라'는, 미래지향적 메시지만을 내포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북한이 대대적으로 위협 수위를 높이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원하는 요구 사항을 가늠할 수 있게 하고, 즉각 대응책을 검토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증거 자료도 되어주죠. 오스트리아 출생의 영국 철학자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힘은 새로운 정보를 얻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서 온다"고요. 과거에서 현재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여기나 저기나 매한가지 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