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동굴에 은둔의 왕국이 있습니다. 누구도 쉽게 오갈 수 없게 장막으로 가로 막은, 자발적 고독을 택한 왕국이지요. 그 곳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법과 상식이 있는 곳이라지만, 그곳에서 탈출한 이들이 전하는 실상은달랐습니다.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왕국은 문제가 심각했지요. 광범위한 인권 침해를오랫동안 자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왕국들에게는 시종일관 거짓말을 해왔다는 이야기가 되거든요.
그래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갖던 동굴 밖 왕국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직접 동굴 안으로 들어가, 탈출한 이들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당신네가 툭하면 멀쩡한 사람을 고문하거나 처형한다고 하니, 직접 가서 조사 좀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다른 왕국들이 접근 허용을 요구하자, 은둔의 왕국은 펄쩍 뛰었습니다. "인권 조사? 웃기고 있네. 그건내정 간섭이자 압살 책동이야!" 이렇게 은둔의 왕국은 인권의 '인'자만 꺼내도 자신들을 공격하려는 '불순한 저의'로 간주하고, 빗장을 더욱 굳게 걸어잠갔습니다.
이 왕국은, 예상하셨겠지만 북한입니다. 북한에 인권 실태 조사를 해보겠다면서 접근 허용을 요청했던 주체들은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과 그 외 국제인권기구들입니다. 또 다른 중요 당사자는 한국 정부이지요. 한국 정부 입장에선 북한의 인권 침해를 바라보는 속내가 더욱 복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류애적 관점에서라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지만, 법적으로는 북한을 자국에 자리 잡은 '주권국가에 준하는 특별지자체'로 볼 수도 있거든요. 즉, 관점에 따라서는 북한에서 고통받는 이들도 한국 정부가 구제해야 할 대상인 자국민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서로 암묵적으로, 함께 공존하는 정치적 실체로 인정하고 있지만요.)
이런 연유로, 한국 정부는 그동안 북한의 인권 침해 실태에 대해 관심있게 지켜봐왔습니다. 물론 정권의 전략에 따라 인권 실태의 공개 여부라든지, 정책 추진 비중의 차이는 있었지만, 사례를 수집하는 일은 계속 해왔습니다. 그러다 어제, 한국 정부가 그간 모은 북한의 인권 실태를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했습니다. 2017년부터 2022년까지 국내에 온 탈북민 508명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 것인데요. 2023 북한인권보고서라는 제목의 조사 결과서였습니다. 총 445쪽 분량의 보고서에는 북한이 사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주민들을 처형한 사례들도 적나라하게 담겼습니다.
몇 가지 사례만 소개해드리자면 이렇습니다. 2018년 평안남도의 한 주민은 시장 뒷골목에서 하이힐과 화장품 등 한국 제품을 팔았다는 이유로 체포돼 공개 총살을 당했습니다. 2017년에는 한 여성이 춤을 추다가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장면이 유포됐는데요. 당시 임신 6개월이었던 이 여성은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했습니다. 2020년 양강도에서는 한 남성이 중국에서 한국 드라마를 들여와 유포했다는 이유로 공개 총살됐고요. 2017년 황해북도 사리원시에서는 여성 7명이 성매매를 조직적으로 운영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 받은 후 곧바로 처형됐습니다.
아동·청소년이 총살된 사례도 있었습니다. 2018년 청진시 강변에서는 종교 행위로 주민 2명이 공개 처형됐는데, 처형된 사람 중 1명이 18세 미만이었습니다. 2015년 강원도 원산시의 한 경기장에서는 16살과 17살 청소년 6명이 한국 영상물을 보고 아편을 했다는 이유로 총살됐습니다. 이렇게 공개 처형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한 탈북민들은 대부분 트라우마에 시달렸습니다. 본인들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북한 당국이 참관을 강제했다는 증언도 나왔습니다. 한 탈북자는 "인민반에서 무조건 (공개 처형장에) 참석하도록 공지했다"며 "(참석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처형이 끝난 후 장소를 빠져 나오는데 한 시간 넘게 걸렸다"고 했습니다. 공개처형이 이뤄질 때마다 최대한 많은 이들이 와서 참관하도록 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죠.
보고서에는 이 외에도 국군포로와 납북자, 이산가족은 별도로 감시하고 차별한다는 점, 인권 침해의 온상 같은 정치범 수용소 5곳도 여전히 운영중이라는 사실이 담겼습니다. 탈북 시도 여성들에 대한 강제 매매혼과 성폭행, 강제 낙태, 나체 검사, 그리고 지적장애인들에 대한 생체실험 증언도 있었습니다. 21세기의 일이라곤 믿기 힘든 사례들이 인권보고서에 빼곡히 담긴 것이죠. 비록 탈북민이 줄면서 작년 이후 내용은 거의 포함되지 않았고, 북한에 대한 접근 자체가 제한돼 탈북민들의 진술에만 상당 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 그리고 탈북민의 신원 노출이 우려된다는 점은 한계이지만, 지금으로선 동굴 속 상황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자료가 바로 이것입니다.
물론 이 자료를 불편해하는 분들도 많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간 보수 정권에서는 북한 인권 문제를 북한을 공격하며, 결과적으로 내부 지지층을 공고히하는 데 활용해온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현 정부가 정치적 목적만 갖고 불순한 의도로 자료를 공개한 것이라고 해도, 이 자료 자체는 큰 의미를 갖습니다. 그간 3급 비밀로 분류돼 일반인은 볼 수 없었던, 적나라한 북한 인권 실태를알 수 있게 된 것이니까요. 그러니이 자료를 보실 때는 북한 인권, 그 자체에 집중해서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이것은 동굴을 도망친 사람들이 증언한, 여전히 동굴 속에 갇혀 신음하는 이들의 이야기이자, 동굴 밖에 있는 우리들만이 들어줄 수 있는 이야기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