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일본 열도와의 사이에앙금이 참 많습니다. 아무리 곱게 보고 싶어도 옛 악몽들이 잊을 만하면 떠오르곤 하죠. 한때 조선을 '상국'이라 여기며 머리를 조아린 일본은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한 후 태도를 바꾸더니 임진왜란을 일으켰습니다. 조선으로서는 '아랫나라'에 친히 조선통신사도 보내주던 터였는데,배은망덕한 일이 아닐 수 없었죠. 게다가 일본 해적인 왜구들도 삼국시대 때부터 툭하면 신라를 습격했는데, 수백 년이 지나 조선시대 때까지도 허구한 날 찾아와 노략질을 해댔습니다.
일본 열도도 그들의 기록대로라면, 악몽 같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의 역사서에는 신라의 해적들이 비단을 훔치거나, 인가를 불태웠다는 기록, 그리고 신라의 정규군도 일본을 침략했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또 몽골 제국이 일본을 침략하던 당시에는 고려의 정규군이 공식적으로 군사력을 보탠 적도있었습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당시 천하를 주름잡던 외세의 침략에, 고려가 앞잡이처럼 가세한 걸로 보였겠지요.
그러나 한일 관계를 틀어놓는 결정적 계기는 이보다 한참 뒤에 등장했습니다.1910년부터 35년간의식민 지배가 바로 그것입니다. 110여 년 전, 일본이 대한제국과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그 통한의 역사는 1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양국에 뿌리 깊은 앙금을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를 놓고, 한국은 불법 식민 지배, 일본은 합법 지배라는 인식을 보이고 있는데, 이 엄청난 간극을 만들어낸 주인공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벌써'라는 뜻의 영단어 'already'입니다.
문제의 'already'가 담긴 한일기본관계조약. 왼편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사본, 오른편은 일본 외무성이 보관하는 원문 사본.
위의사진이 문제의 'already' 문구가 담긴 한일기본관계조약입니다.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이죠. 해방 후 20년이 지난 1965년 6월 22일, 양국의 외교부 장관 (당시 각각 외무부 장관, 외상)이 최초로 체결한 조약이었습니다. 조약은 총 7개로 구성이 돼있는데, 그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아래에 있는 제2조입니다.
"It is confirmed that all treaties and agreements concluded between the Empire of Korea and the Empire of Japan on or before August 22, 1910 arealready null and void.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이 문안은 원래 한국 정부가 처음부터 원했던 문안은 아니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 일본에 의한 식민 통치가 불법이라는 것을 확실히 못박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조약과 협정들이 모두 "체결 당시부터 무효"라고 해석되는 "~are null and void"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그러나 일본 정부는 극구 반대했습니다. 일본 측은 "(이번) 조약 체결로 비로소 과거의 조약과 협정들이 무효가 된다"는 뜻의 "~have become null and void"를 주장했습니다. 그 말인 즉슨, 일본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과 그 이전의 강제조약들이 체결 당시에는 합법이었지만, 한국의 독립 시점에 비로소 무효가 됐다는 주장이었지요.
그렇게 양측이 끝없는 논쟁을 벌이자 결국 한국 정부는 일본 측이 제시한 타협안에 가서명을 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일본 측 타협안은 기존에 한국측이 제기한 문안인 "~are null and void"에 "already"가 추가된 문안이었습니다. 얼핏 보면 '이게 왜 문제지?' 싶으실 수 있지만, 일본 정부가 일본어로 표기한 문구를 보면 왜 이것이 문제인지 알 수 있습니다.
왼편은 일본 외무성이 정리한 '한일기본관계조약'의 영문 버전. 오른편은 국가기록원이 보관하는 '한일기본관계조약' 한국어 버전. 각각 외무성, 국가기록원 참조.
일본어로 번역된 '한일기본관계조약'의 2조. 빨간 상자 안에 'already'를 일본어로 번역한 'もはや (모하야)'가 적혀있다. - 외무성 자료 참고
위 사진에 보시면, 'もはや (모하야)' 라는 단어에 빨간 상자 표시가 돼있습니다. 이게 바로 일본 정부가 'already'를 일어로 번역해낸 결과물입니다. 'もはや(모하야)'는 '벌써', '이미'라는 뜻도 있지만 '이제 와서는', '마침내'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즉, 일본 측은 '이제 와서는'이라는 뜻으로 사용해서, 옛날의 협정과 조약들이 이번에야 비로소 무효가 됐다, 즉 예전에는 합법이었다고 해석하고자 했습니다. 한일 양국의 이런 해석 차이는 끝내 해결되지 못했고, 결국 양국은 외무장관회담에서 "상대방의 번역문에 대해 양해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유보하에 상대방이 사용하는 문장에 대해서는 서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로 합의"했습니다. 상대가 뭐라고 떠들든 내버려둔다고 합의한 것이었죠.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이런 모호한 표현이 낳을 문제를 몰랐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 정부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이 모호한 표현을 전략적으로 활용했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당시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위해선 거액의 외자를 얻어야 했는데, 일본과 조약만 잘 체결하면 일본의 자본을 기대할 수 있었거든요. (실제로 이 조약의 부속협정인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으로 한국 정부는 3억 달러의 무상 자금과 2억 달러의 차관을 얻었습니다.) 즉, 'already'라는 문구는 일본 정부뿐 아니라 한국 정부의 입장에서도, 상대의 마지노선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아전인수식 해석으로 자국민에게 설명할 수 있는 마법의 단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이 정치적이고 모호한 문구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한일 관계를 들었다 놨다 하는 원흉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이 표현이 담긴 한일기본관계 조약 자체도아쉬운 대목이 참 많습니다. 일본의 식민 통치와 관련한 내용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도, 한국 정부의 지위와 관할권을 규정하는 제3조의 조항도 모호하게 만든 것도 한계로 지적되죠. 일본이 여전히 1910년 한일병합조약은 합법이었으며, 따라서 식민 통치도 합법이라는 주장을 이어가고 있는 데는, 이렇게 모호한 문안이 근거로 활용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입니다. 역사 문제를 이야기할 때 만약을 가정하는 것처럼 허무하고 씁쓸한 일도 없지만, 만약 한국 정부가 'already'로 상징되는 타협 대신에 원칙을 관철시키는 소신을 택했다면 어땠을까요. 적어도 한일관계의 모습은 많이 달라지진 않았을까요?
※ 참고 : 유의상, 「한일 과거사 문제의 어제와 오늘 (식민 지배와 전쟁 동원에 대한 일본의 책임)」, 동북아역사재단, 2022/12/10.
※ 사진 참고 :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된 한일기본조약 사본 by Motoko C. K.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