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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윤리 운영 표준 | 법적 최소를 넘어서는 문화

더 오래 가는 신뢰를 위한 일의 습관

by 짱고아빠

윤리는 마음으로만 지켜지지 않습니다. 시스템 안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누군가의 결심이나 감정이 이 시스템에 들어오면 언제든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윤리를 감시의 절차가 아니라 일의 구조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시스템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윤리가 선언이 아니라 습관이 되어야 비로소 오래갑니다.


현장에서 윤리는 종종 감사나 감독을 위한 절차로 오해받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소개하는 윤리 운영 표준(SOP)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더 안전하게 일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일의 매뉴얼입니다.

국내외 주요 NGO와 모금가협회들이 공유하는 공통된 기준을 바탕으로 법적 준수와 윤리 자율성, 동의(Consent), 데이터 거버넌스, 콘텐츠 윤리, 문화화의 다섯 가지 축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법적 준수와 윤리 자율성


법은 우리가 넘어서는 안 되는 최저선이고 윤리는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기준선입니다. 기부금품법이나 개인정보보호법을 지키는 건 출발점일 뿐 ‘법적으로 문제없다’는 말이 ‘윤리적으로 괜찮다’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동의(Consent) : 신뢰의 첫 문장


디지털 캠페인은 클릭 한 번으로 세상과 연결되지만 동시에 그만큼의 책임이 따릅니다. 동의는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사람을 향한 첫 약속이에요. 후원자든 수혜자든, 우리가 그들의 정보를 다루는 순간 그들의 삶 일부를 함께 다루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정보를 수집할 때는 아래 여섯 가지가 점검되어야 합니다.


이 정보를 왜 수집하는가

어느 범위까지 필요한가

어디에 활용되는가

언제까지 보관할 것인가

마음을 바꾸면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다른 용도로 재활용할 때 다시 동의를 받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모두 ‘예’라고 답할 수 없다면 그 캠페인은 잠시 멈춰야 합니다. 윤리는 일을 멈추게 하는 게 아니라 더 오래가게 하는 안전장치니까요.



데이터 거버넌스


윤리의 상당 부분은 데이터에서 시작됩니다. 특히나 요즘같은 시대는 후원자와 수혜자의 정보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신뢰의 깊이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아래 세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최소 수집의 원칙 : ‘혹시 나중에 쓸 수도 있다’는 이유로 불필요한 정보를 모으지 않을 것

권한의 분리 : 열람, 수정, 출력 권한을 역할별로 구분하고 누가 언제 어떤 정보를 조회했는지를 기록

보존과 파기 기준 : 후원이 종료된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삭제되도록 시스템화하고 그 이력은 감사 로그로 남겨둘 것



콘텐츠 윤리 : 감정보다 구조로


모금 캠페인은 감정을 움직이는 일이지만, 감정만으로는 신뢰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감정은 순간이지만 콘텐츠는 기록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저는 T-1, T+7 검수 체계를 추천합니다.


T-1 : 콘텐츠를 공개하기 하루 전, 담당자 외의 제3자가 윤리 체크리스트로 점검

T+7 : 공개 후 일주일 이내에 대상자와 후원자의 반응을 모니터링해 문제가 있으면 즉시 수정하거나 삭제.



문화화 : 윤리가 일의 방식이 될 때


이런 윤리가 제도나 문서로만 존재하면 금세 피로해지고 지켜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윤리 점검을 팀의 습관처럼 두려합니다. 아이디어 회의 중에도 자연스럽게 묻습니다.


“이 문장은 후원자에게 어떻게 들릴까?”, “클라이언트가 이 사진을 보면 어떤 기분일까?”


그 짧은 질문 하나가 윤리를 조직 안에 스며들게 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에요.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캠페인에는 늘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예전에는 관성처럼 이 동의칸을 ‘부모님’으로 채워넣었죠. 그리고 한달 뒤 학교 선생님께 전화를 받았습니다. ‘부모’가 없는 친구들은 어떻게 하냐는 애두른 항의였습니다. 저의 쉬운 선택이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죠. 저는 ‘부모님’을 ‘보호자’로 한장한장 고쳤습니다. 이 후 작은 단어 하나도 이런 관성에 의한 실수는 없는지 늘 점검합니다.


이런 윤리 점검표보다 더 중요한 건 사실 윤리에 대한 대화가 끊이지 않는 문화입니다. 서로의 관점을 듣고, 불편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분위기 이게 윤리를 지탱하는 가장 튼튼한 기반입니다.


윤리를 강력하게 말하는 조직이 결국 신뢰를 만드는 조직입니다. 윤리는 감시의 규정이 아니라 신뢰의 습관이에요. 법의 한 줄보다 강력한 건 우리가 매일 던지는 질문 한 줄입니다.


“이게 정말 옳은가?”, “이 장면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진 않을까?”


이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방향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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