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하는 거 말고 보는 거. 야구를 처음 본 건 초등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한다. 어느 날 외삼촌이 우리 집에 오랜만에 방문했는데 TV를 틀더니 야구 중계를 보기 시작했다. 난 그 때 야구가 뭔지도 몰랐는데 그저 외삼촌을 따라 야구 중계를 봤다. 외삼촌이 ‘앗싸~ 달려 달려’를 외치면 나도 ‘앗싸~ 달려 달려’를 외쳤고, 외삼촌이 ‘에라이~’를 외치면 나도 ‘에라이~’를 외쳤다. 규칙은 잘 몰랐지만 뭔가 짜릿하고 멋있었다. 남자라면 이런 스포츠를 즐겨야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을 가지게 되었고, 엄마한테 글러브를 사달라고 졸라댔다. 이후 난 주말마다 야구를 봤다. 내 동생까지 끌어들여 야구 동지로 만들었다. 야구가 끝나면 밖에 나가 내동생과 공을 던지고 받으며 투수 흉내를 냈다. 공을 칠 타자도 없는데 괜히 긴장하며 던졌고 긴장 탓에 공은 엉뚱한 곳을 향하기도 했다. 한번은 지나가던 아저씨의 중요부위(?)를 맞혔다가 집에서 쫓겨날 뻔했다. 그래도 난 멋진 변화구 한번 던져보겠다고 야구 선수들의 그립(공 잡는 법)을 연구했고 그럴싸한 폼으로 던져댔다. 변화구라고 던진 공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바람이라도 불어 조금 휜다 싶으면 나와 내 동생은 마구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물론 그 이후로 마구는 다신 던질 수 없었다. 마구를 던질 수 없다는 이유로 난 투수를 포기했다.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다.
난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했다. 그때도 삼성은 명문 팀이었지만 늘 2위만 했던 걸로 기억한다. 잘 하다 마지막 한국시리즈에서 좌절을 반복했다. 난 간절히 삼성을 응원했다. (삼성이라는 기업을 응원하는 건 절대 아니다. 야구팀을 응원했을 뿐)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경기 중계를 보기만 하면 패했다. 날 실망시키는 선수들이 미웠다. 난 어떻게 하면 삼성이 이길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느 주말, 그 날도 야구 중계를 보고 있었다. 0 대 6 으로 지고 있었다. ‘오늘도 졌구나!’ 하고는 TV를 끄고 밖에 나가 놀았는데 저녁에 스포츠 뉴스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삼성이 역전을 했단다. 그 뒤로도 내가 중계를 보면 삼성이 지고, 중계를 보지 않으면 삼성이 이기는 현상이 계속되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난 더 이상 삼성이 이기는 걸 볼 수 없는 운명인가? 야구 중계가 너무 보고 싶었지만 난 한동안 중계를 보지 않기로 했다. 그랬더니 삼성은 연승을 이어갔다. 정확히 몇 연승까지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그 땐 정말 나 때문에 삼성이 이기는 줄 알았다.
첫 번째는 내가 야구에 소질이 없다는 것. 두 번째는 내가 야구 중계를 보지 않으면 삼성이 이긴다는 것. 사실 이 두 가지 생각을 하기 전에 난 꽤 열정에 가득 차 있었다. 한창 야구에 빠져 있을 땐 야구 선수들 이름을 줄줄 외고 투수의 방어율과 타자의 타율까지 꾀고 있었다. 게임도 야구 게임만 하고 좋아하는 야구 선수의 사진을 모으기도 했다. 야구 해설을 시키면 자신 있어 할 정도로 야구 공부에 매진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야구에 소질이 없다 생각했을 때. 그 생각이 삼진 아웃 당한 타자처럼 허무로 이어질 때 난 더 이상 야구와 관련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내가 야구 중계를 보지 않았는데 삼성이 이긴 날. 아직 어렸던 난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으리라. 운명처럼 배신감은 반복되었다. 결국 난 내가 야구 중계를 보지 않으면 삼성이 이긴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그게 말이 되는가? 내가 보든 안 보든 삼성은 이길 경기는 이겼을 테고 질 경기는 졌을 것이다. 우연치 않게 삼성은 연승을 했지만 난 그때부터 야구 중계를 보지 않았다. 이게 다 삼성을 위한 일이라고 여기면서 그랬지만 이후 난 야구로부터 멀어졌다. 내 삶에서 야구는 잊혀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니 난 야구를 참 좋아했고 그 마음이 활화산처럼 솟아날 땐 야구가 내 삶을 지배했다. 야구만 생각할 땐 야구를 운명이라 여기기도 했다. 만약 그렇게 계속 살았다면 난 어쩌면 야구 선수가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이란 참 얄궂은 것이고 그 생각의 의지는 유통기한이 있는 연약한 속성을 지녔다. 현실의 벽을 느끼고 좌절하면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낳는다. 그 생각은 ‘난 할 수 없다.’ ‘난 소질이 없다’ ‘내가 끼면 잘 안 된다’는 어두운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 기운이 내 소질을 합리화하고 경기 결과를 조작했다. 그럴만한 손톱만큼의 이유라도 발견하면 난 ‘야구엔’ 소질이 없다고 여기고 ‘내가 봐서’ 야구에 졌다고 여긴다. 운명 같았던 야구는 그저 좋아했던 스포츠로 남았다. 처음에 가졌던 내 생각이 싱싱함을 잃었다. 현실적 어려움이 내 생각을 바꿨고 내 운명을 바꿨다. 생각이 곧 운명이었다. 법정스님이 쓴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자신의 생각이 곧 자신의 운명임을 기억하라. 우주의 법칙은 자력과 같아서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어두운 기운이 몰려온다. 그러나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면 밝은 기운이 밀려와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춘다. 밝은 삶과 어두운 삶은 자신의 마음이 밝은가 어두운가에 달려 있다. 그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생각이 운명이라는 명제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시크릿>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끌어당김의 법칙’이라는 말이 온갖 자기 개발서에 등장한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그들의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재는 여전히 불만족스럽다. 간절히 원하지 않아서일까? 생각을 잘못해서일까? 어떤 경우라도 우릴 주눅 들게 한다. 내가 덜 간절해서 내가 잘못해서 지금 이 모양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열정을 잠들게 한다. 열정이 잠들면 상황에 떠밀려 살게 되고 상황이 나빠지면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 마음속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 열정이라는 연료가 다 했기에 우린 언제 파도에 휩쓸려 난파될지 모른다.
생각은 영원불멸하지 않다. 생각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생각은 어느 정도의 유통기한을 갖고 있다. 처음 가졌던 생각의 싱싱함은 운명처럼 시들어간다. 싱싱함이 사라지고 현실 속 어려움이 우릴 도망치게 만든다. 의지가 약한 상태에서 위기에 몰리면 누구든 도망칠 구멍을 찾게 된다. 어딘가에 그럴만한 변명거리가 있다면 그걸 핑계로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첫 마음을 간직하고 의지로 현실을 이겨내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린 생각이 싱싱할 때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의 내 생각이 시들더라도 그 생각의 열정을 이어줄만한 새로운 생각을 품고 키워나가야 한다. 내가 만약 투수가 되고 싶어 열정을 뿜을 때 스승이 될 만한 누군가를 찾거나 타자가 되어 볼 생각을 했다면? 불굴의 의지로 성공한 야구 선수들의 이야기를 찾아봤다면? 새로운 시도와 선배들을 징검다리 삼아 난 더 앞으로 나아갔을지 모른다. 새로운 생각이 새로운 길을 연다. 모두가 힘들다고 포기했다면 이 세상에 야구란 스포츠는 없었을 것이다.
내 앞에 놓인 정해진 길이다. 하지만 운명은 정해진 길이기에 바꾸고 싶은 길이기도 하다. 정해져 있다고 포기할 사람은 그냥 포기하는 게 마음 편하다. 하지만 정해져 있다는 사실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갈 사람에게 운명은 내가 걸어가는 길이다. 내가 생각하고 그 생각대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그 길이 나의 운명이고 나의 생(生)이다. 안다. 말은 쉽지만 행동은 어렵다는 걸. 생각은 할 수 있지만 운명은 바꾸기 힘들다는 걸. 어렵다. 힘들다. 그래서 나도 야구와 멀어졌고 야구 말고도 내 곁을 떠나간 수많은 가능성들이 인생의 가로등처럼 내 뒤로 불 켜져 있다. 하지만 우린 나아가야 한다. 이 어둡고 불안한 세상을 살아내야 하고 그 길을 누가 대신 걸어줄 순 없다. 어렵고 힘들어서 포기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걸어온 내 등 뒤의 가로등은 약하지만 내 앞을 어스름히 비춘다. 그 옅은 빛이 있으니 우린 해낼 수 있다. 힘낼 수 있고 아직 우리의 마음속엔 열정의 연료가 충분히 남아 있다. 열정에 불을 붙이고 타석에 들어서라. 9회말 2아웃에도 홈런은 나온다. 역전을 상상하고 홈런을 떠올려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