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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효봉 Jun 20. 2018

무기력한 아이와 여행하는 법 :
나한테 맡겨요!

아이와 여행을 떠나는 모든 부모들에게

“아빠, 머해?”

“내일 캠핑 갈 준비~”

“정말? 우리 어디 가는데?”

“그건 비밀이야. 아빠가 봐 둔 곳이 있어.”

“에이~ 좀 말해주지. 지난번처럼 엄마한테 혼나는 거 아니야?”

“걱정 마. 이번엔 아빠가 확실한 곳으로 정했어.”

“이번엔 가서 뭐하는데?”

“그것도 비밀! 엄청 재미있을걸! 기대해.”

“진짜?”

“그럼! 근데 누가 좀 도와주면 더 재미있을 거 같은데...”

“엄마한테 도와달라고 할까?”

“남자가 필요해. 똑똑하고 센스 있는 조수가 필요한데...”

“잉? 그럼 아빠, 나한테 맡겨! 내가 해볼게!”



#1 무기력에 빠지는 아이들


여러분의 아이들은 어떤가요? 뭐든지 해보려고 의지를 불태우는 편인가요? 아니면 시큰둥한가요? 여행을 준비하거나 여행지에서 아이가 의욕을 가지면 참 기특하게 느껴집니다. 잘 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내가 한 번 해 볼게!’ 하고 나서는 아이는 어른들을 흐뭇하게 합니다. 대체로 아이들은 어릴 때 뭔가 해보겠다는 의욕이 넘칩니다. 이것도 해보고 싶어 하고, 저것도 해보고 싶어 하죠. 그러다가 어느 정도 커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면 의욕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물론 성격이나 환경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나지만 대개 사춘기쯤 되면 의욕적인 아이들이 멸종됩니다. 의욕 대신 해야 할 일들을 하느라 바쁘거나 관심 있는 몇몇 일에만 집중하는 쪽으로 변합니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고 피곤함에 지치면 무기력이 찾아오게 되죠. 


무기력한 아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움직이기도 싫어하고 모든 일에 심드렁한 아이들. 뭘 해보려는 의욕을 상실한지는 오래됐습니다. 오로지 스마트폰만 쳐다보며 시간을 보냅니다. 무기력한 아이들은 여행도 귀찮아합니다. 여행 가봐야 재미도 없고 피곤하기만 하다고 생각하죠. 그냥 집에서 편하게 뒹구는 게 최고라 여깁니다. 제가 만난 아이들 중에도 이런 아이들이 꽤 있었습니다. 어디서 뭘 해도 시큰둥하고 친구들하고 어울려 놀고 싶어 하지도 않았지요.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으니 하고 싶은 게 없답니다. 소망이 있다면 그저 이 여행이 빨리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 방에서 편하게 누워 쉬고 싶다더군요. 이제 몇 군데를 더 가야 하는지, 집에는 대체 언제 가는지만 자꾸 묻습니다. 아이가 이런 반응을 보이면 괜히 죄짓는 느낌이 듭니다. 내가 뭘 잘못해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요.



#2 아이들이 무기력에 빠지는 이유


아이들이 무기력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기력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내용이 ‘학습된 무기력’입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마틴 셀리그먼 교수는 1975년에 학습된 무기력에 관한 연구를 시작합니다. ‘셀리그먼의 개’로 잘 알려진 이 실험은 개를 세 집단으로 나눠 각기 다른 상황에서 전기 충격을 가한 실험입니다. 첫 번째 집단은 전기 충격을 받지만 코로 스위치를 누르면 멈출 수 있게 했고, 두 번째 집단은 똑같은 전기 충격을 받지만 스스로 멈출 수 없게 했습니다. 세 번째 집단은 전기 충격을 주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세 집단의 개들을 실험 상자에 넣고 칸막이를 뛰어넘으면 전기 충격을 피할 수 있도록 했는데요. 첫 번째 집단과 세 번째 집단의 개들은 칸막이를 뛰어넘어 스스로 전기 충격을 피했지만, 두 번째 집단의 개들은 잠시 움직이다가 피하길 포기하고 전기 충격을 그대로 받았다고 합니다. 피할 수 없는 전기 충격을 여러 번 경험한 두 번째 집단의 개들은 무기력을 학습해 피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도 피하려 하지 않았던 거죠. 이를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합니다. 


무기력이 학습된다는 이야기는 아이들의 무기력이 어디서 왔는지 짐작케 합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무기력을 학습했을까요? 아이들도 나름대로 뭔가를 해보려 했을 겁니다. 학교 공부도 잘 하고 싶고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인정도 받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좌절을 반복하면서 결국 무기력을 배우게 됩니다. 어떤 경우엔 시도할 기회조차 얻지 못합니다. 해봐도 별 소용없다는 생각을 가지면 자연스레 그냥 하지 말자고 생각하는 거죠. 셀리그먼의 실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기력을 학습하게 되면 상황이 긍정적으로 바뀌어도 무기력한 모습을 계속 보이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학습한 이 무기력은 결국 우리 어른들이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김현수의 <무기력의 비밀>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요즘 아이들과 청년들의 무기력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중략) 우리나라에서는 학교 공부를 잘해서 명문대에 입학한 
아이들에게만 기회와 관심, 사랑을 주는 시스템이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다. (중략) 
살아남은 자만이 영광을 차지할 수 있는 시스템에서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무기력해지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이 과정에서 소수의 승자는 승자대로 불행해지고 
다수의 패자는 패자이기에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3 무기력 극복의 열쇠


결국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시스템 속에서 아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모든 아이들이 무기력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상황이든 무기력을 이겨내고 생기발랄하게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은 하고 싶다는 의욕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합니다. 실제로 셀리그먼의 실험에서도 두 번째 집단의 개 가운데 무기력을 이겨내는  개들이 있었습니다. 계속된 좌절을 경험했지만 실험자가 개들을 안아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놓기를 반복하니 무기력을 이겨낼 수 있었죠. 누군가의 도움으로 긍정적인 상황을 반복해서 경험하면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상황을 반복해서 경험하는 것. 이것이 무기력을 극복하는 열쇠죠.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가 긍정적인 상황을 경험하려면 부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어떤 기회를 주고,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많은 게 달라집니다. 일상에서도 이런 도움이 필요하지만 여행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계기가 마련되지요.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 여행하면서 겪는 다양한 상황들이 모두 황금 같은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잘 활용하고 반복해서 경험할 수 있게 도와주면 무기력을 의욕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아이와 함께 여행하면서 다음 네 가지를 시도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첫째, 작은 성공을 경험하게 해주세요. 

시작은 항상 쉽고 간단한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어렵고 복잡한 일에 도전하면 좌절만 경험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작은 일 하나를 일단 아이에게 맡겨보세요. 쉽게 해낼 수 있고 간단하게 성과를 볼 수 있는 일이 좋습니다. 준비물 챙길 때 역할을 주거나 물건을 하나 사 오게 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금방 성공을 경험할 수 있고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쉬운 일을 다 해버렸다면? 어려운 일을 쉬운 일로 쪼개서 하나씩 해보는 겁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아이 입장에서 쉬운 일이어야 한다는 것과 어떤 일인지 분명해야 한다는 겁니다. 어른이 생각할 때 너무 쉬운 일이더라도 아이는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방적으로 ‘쉬운데 이걸 왜 못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또한 분명한 일을 분명하게 맡겨야 합니다. 가끔 부모는 아이에게 무슨 일인지 모르면서 추상적인 일을 맡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체적인 절차를 생략한 채 그냥 아이에게 여행 계획을 세워보라고 한다거나 무조건 스스로 해보라고 등 떠미는 때도 있죠. 정작 부모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를 때 그렇습니다. 모르면 같이 해보거나 공부하면 됩니다. 그런 다음 그 일을 분명하고 세부적인 일로 바꿔 이야기하는 게 좋습니다.


둘째,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무기력에 빠진 아이들은 대체로 자존감이 낮습니다. 자존감이 낮으면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싫어하는데요. 다른 사람들 틈에 숨거나 이름 없는 존재로 남아 있으려 합니다.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죠. 자존감을 높이려면 내가 사랑받을만한 존재임을 알게 해야 합니다. 뭔가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스스로 깨달아야 하죠. 그렇게 되려면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많은 어른들이 아이가 능력 있는 존재가 되길 바라면서도 정작 능력을 펼칠만한 기회는 주지 않습니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따르길 바랄 뿐이죠. 학교에서도 시험을 잘 치거나 특별한 재능을 발견한 아이에겐 관심을 쏟지만 이외의 대다수 아이들은 배경 취급을 받습니다. 여행을 떠날 때 아이가 주인공이 되도록 해 보세요.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진행하는 모든 과정을 아이가 주도적으로 이끈다면 어떨까요?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하긴 어렵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처음엔 작은 일을 맡겨 성공을 경험하게 해 주고 하나씩 일을 늘려나가는 거죠. 그러다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싶으면 아이에게 여행을 이끌 권한을 주세요. 잘 안 되면 어떻게 하냐고요? 당연히 잘 안 될 겁니다. 처음부터 잘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죠.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여행의 과정에서 아이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아주고 북돋아주면 발전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여행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멋지게 해낸다면 무기력을 의욕으로 바꿀 수 있을 겁니다.



셋째, 도전의 의미를 알게 해주세요. 

도전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제가 대학생 때 김희중의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때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어 일기장에 적어 두었는데요. 그 구절은 이런 내용입니다. 


어느 세상에나 인간 본연의 진실이 있고, 
진실은 마침내 통하게 마련이다. 

꼭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기 위해
도전하는 것은 아니다. 
최선을 다한다면 얻을 수도 있고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도전은 반드시
자신의 세계를 넓히게 마련이다.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의욕적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한동안 실망감에 젖어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이 구절을 읽으며 용기를 얻곤 했는데, 지금 다시 읽어봐도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 도전하지만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은 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실패했다고, 얻은 게 없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결과보다는 도전 그 자체를 통해 충분히 성장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진정한 도전의 의미는 자신의 세계를 넓히는 데 있습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에서도 이런 도전의 의미를 알려 줄 필요가 있습니다. 여행은 그 자체로 도전입니다. 여행의 결과에 관계없이 여행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배웠고, 그 배움으로 생활을 어떻게 바꿔나갈 수 있는지 가르쳐주세요. 도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도전의 진정한 의미에 주목할 때 무기력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넷째, 격려하고 응원해주세요.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격려야말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칭찬보다는 용기를 부여해주는 격려를 강조하는데요. 칭찬은 보상에 의존하게 만들지만, 격려는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용기를 부여해준다고 합니다. 아이와 함께 여행을 하다 보면 다양한 일을 겪게 되는데요. 그때마다 아이에게 어떤 분위기에서 어떤 태도로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많은 게 달라집니다. 격려와 응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우선 가장 먼저 아이를 믿어야 합니다. 아이를 향한 믿음 없이 격려와 응원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믿음은 언제나 우리의 몸을 통과합니다. 마음속 깊이 아이를 믿고 있다면 굳이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아이는 느낄 수 있습니다.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아이를 격려하게 되고 진심으로 응원하게 됩니다. 격려를 위한 몇 가지 방법, 응원을 위한 필수적 요령을 익혀 앵무새처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잠시뿐입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내 아이를 믿는다는 강한 심지가 박혀 있고 그 심지에 불을 붙여야 마음의 온기가 전달됩니다. 아이를 믿기로 했다면 이제 칭찬과 격려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칭찬은 어떤 행동의 결과를 비교, 평가하고 보상해주는 일이지만 격려는 다릅니다. 비교하지 않습니다. 평가하지 않습니다. 결과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아이는 존재 자체로 이미 격려받아 마땅합니다. 욕심을 내면 모든 게 불만스럽게 보이고 부족해 보입니다. 조금이라도 열심히 하는 모습, 용기 내서 시작한 그 마음을 알아주고 사진 찍듯 포착해 보여주는 게 격려와 응원입니다.



#4 성장을 기다리는 시간


무기력은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나 살면서 무기력을 경험합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무기력한 적이 없었던 사람이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스스로 무기력에서 벗어날 줄 아느냐입니다. 무기력을 불치병처럼 여기고 그런 아이들을 한심하게 여기는 시선은 일탈을 부를 뿐이죠. 오히려 무기력을 경험하고 극복하는 과정 속에 성장이라는 단어가 숨어 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를 바꾸기보다 무기력이 반복되는 이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악순환이 일어나지 않도록 배경을 바꾸고 할 수 있다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게 우리의 일입니다. 무조건 지금 당장 아이들을 바꾸기 위해 조바심 내다간 모두의 감정만 상합니다. 아이와의 시간이 너무 답답하다면 함께 여행해보세요. 여행하면서 아이가 겪고 있는 무기력의 시간을 이해해보세요. 아이들이 경험하는 무기력의 시간을 너무 조급하게 바꾸려고 하지 마세요. 이 시간은 번데기처럼 다시 태어나기 위해 몸을 감싸고 있는 순간입니다. 기다려주고 기회를 주고 격려와 응원으로 빗물처럼 속삭여보세요. 시간은 언젠가 무기력의 껍질을 벗고 의욕의 날개를 단 아이가 스스로 나비처럼 날아오르는 신비를 우리 앞에 보여줄 겁니다. 


그 신비로운 시간을 함께 여행하세요. 




작가의 책

http://aladin.kr/p/xf1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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