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 첫 시부모의 생일을 맞이하였다.
결혼하고 첫 생신을 며느리 차린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듣기는 했다.
남편도 아빠 생일 어떻게 하자가 아니라
어떻게 할까라고 나에게 물어보았다.
보나 마나 시어머니가 시켰을 물음이었는데
그때는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에게 나는 첫 생신이니까 집에서 하지 뭐라며 단순하게 이야기했다.
다음날 시어머니한테 아침부터 전화가 왔다.
"얘! 다음주가 아버지 생신이야! 결혼도 하고 살림도 차렸으니 아버지 생신 때 너희 집으로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것이 어떠니?"
"네...????? 저도 생신상 차리려고는 했는데......"
"그래. 그러니까 네가 결혼하고 집들이도 안 했잖니? 큰집에 누구랑 누구랑 고모랑........."
집들이는 이주도 안 돼서 오빠 친구들이며 시부모까지 다 직접 해서 치렀다.
이바지 음식으로 많이 먹이고 나눠서 싸서 보냈다.
근데 이 좁은 집에 식탁도 4인용인데.....
"그 정도 갈 것 같으니까 준비해라. 뭐 할 것 없이 밥만 먹으면 되지. 미역국이랑."
"......................."
남편은 그냥 미역국 해서 밥이랑 먹는 거지 뭐~라며 가볍게 말했다.
그렇겠지... 지가 하는 게 아니니...
본인 엄마에게 들은 그대로..따라하는 앵무새...
큰 아버지, 큰 형님 내외와 자녀 1명, 작은 형님내외와 자녀 2명, 고모님과 고모님 자녀 1명과 그의 자녀 2명, 큰 아버지의 딸과 그 딸의 자녀 1명, 동서 내외와 자녀 2명, 시부모까지....
결혼하고 겨우 시작하는 살림인데 26명이 넘는 음식을 만들라니...
결국 친정엄마가 참 대단하시다며 오셨다. 너 혼자 이걸 어떻게 하냐고.
시부모와 남편은 사서 하는 것은 안 하는 거랑 똑같고
싹싹 다 먹으면서도 짜네, 싱겁네, 비싸네, 양이 작네, 크기가 작네
계속 욕하면서 구시렁거리는 걸 알고 있었기에 무식하게 다 만들게 되었다.
(그때는 정성을 보이면 불평 불만이 사그라질 줄 착각하던 시절이였기에 노동을 선택했다.)
상까지 사고 앉을 곳이 없어서 신발장 앞까지 상을 펴야 했다.
그 많은 손님 중 단 한분, 큰 형님께서 유일하게 신혼집 선물을 들고 오셨다.
"아니 새댁이 이렇게 큰 상을 어찌 다했어. (선물을 건네시며) 이거 별거 아니야~."
하시면 얼른 부엌으로 들어와 일을 도와주셨다.
시어머니는 마치 본인이 한 것처럼 친정엄마의 요리를 들고 생색을 내셨고
형님께서 "작은어머니 너무 빨리 넘기신 거 아니에요~"라고 농을 쳐 주셨다.
남이 보아도 내가 불쌍했나 보다.
산더미 같은 설거지까지 중간중간 도와주시고 돌아가셨다.
그날 잘 먹고 간다. 너무 고생했다고 말한 사람은
남편도 시부모도 아니었다. 형님 딱 한 분이셨다.
시어머니의 첫 생신은 내가 임신초기였다.
첫 생일만 챙길 거라고 그에게 말했다.
어김없이 주말 시댁지옥행을 가게 되었다.
본인이 이야기를 꺼냈고
"어머니 첫 생신이니까 미역국만 끓이고 제가 할게요."
(20인분도 시켜서 했는데 꼴랑 4인분을 왜 못 하겠나...)
"아니다~ 네가 홀몸도 아닌데 우리 간단하게 사 먹자."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정말 너무 무서웠다 나중에 무슨 소리로 사람 피를 말리려고 저러시지 싶었다.
"아니다. 힘들어~ 그냥 나가서 간단히 사 먹자~"
나중에 깨달았지만 시어머니는 외식을 좋아하는데 그날까지 집밥을 먹기 싫으신 거였다.
"얘! 저기 가서 저것부터 볶아라."라고 하시기에
부엌으로 들어가 채소를 다듬고 있었다.
갑자기 옆에서 야채를 다듬는 시늉을 하시더니
"얘! 내 친구 며느리는 결혼하면서부터 아버지 어머니 생신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세요~라고 했다더라."
"??????? 네?????"
"아니~ 그랬다고 며느리가 먼저 생일이랑 대소사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네."
"....네..?................ 어머니 제가 생일상 차린다고 말씀드렸는데...."
당황한 나의 목소리가 부엌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어 그래. 알지. 그냥 그랬다는 거지. 넌 뭐 지금 요리를 어떻게 하니 힘들어서 중국집이나 가자."라며
내 입을 막았다. 부엌밖에 사람들 들으라는 듯이 한층 높은 소리였다.
어이가 없고 당황스러웠다. 그 뒤에 그 집 며느리와 비교한 말들은 들리지도 않을 만큼 화가 났다.
뭐가 힘든가 매주 와서 요리하고 설거지를 하는데
그날 하루 더 한다고 4인분이 더 힘들까?
이때까지 잘 얻어먹어놓고 나랑 뭐 하자는 것인가...
본인이 좋아하는 중국코스요리, 고기, 갈비 좋아해서 그걸 먹고 싶은 거면서
왜 내 애를 팔아서... 내 애를 핑계로 날 위하는 척....
그 가증스러움에 황당하기 짝이 없던 기분으로 거실에 앞치마를 벋고 앉아있었다.
그와 시부는 소파에 앉아있었다. 근데 왜 이 이야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과일을 깎고 있던 나에게 시어머니는 말했다.
"야! 나는 우리 아들이 전문직이랑 결혼했으면 좋겠었는데
의사나 약사나 변호사나.....나는 너무 아쉬워 그게..
그래서 소개도 해주고 그런 애도 만나고 하더니 너랑 결혼을 했잖아?"
.....................................
나에게 도대체 어떤 대답을 원하셨던 걸까..?
아마도 그냥 싸지르는 똥을 담을 그릇을 찾으신 거겠지.
그날도 너덜너덜 만신창이 되어 체한 속을 달랠 수가 없어서 손을 주무르며 돌아왔고
그날 밤 나는 잠을 설쳐야 했다.
다음날 그에게 말했다.
나에게 이렇게 하셨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못 들었다고. 어머니가 이런저런 말할 수도 있는 거지 신경 쓰지 말라고.
.............
그렇게 시작된 생일상은 10월에 한번, 11월에 한번, 12월에 한 번은 내가 차려야 했고
시어머니는 기호에 맞는 식당에서 나의 대한 배려로 극구 사양하는 거야라는 레퍼토리와 함께 아들아 나는 좋은 시어머니다를 어필하는 생일상과 돈봉투와 선물을 챙기셔야 했다.
그 사이 시부모들의 만행은 더 다양해졌고 (내가 느끼기에)
그를 포함한 그들은 아무도 그게 한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스트레스라고 생각하지 못하였다.
8년의 시간이 흘렀고 사이는 나의 심신의 고통은 더 악화되었고
그들 덕분에 부부사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일이 있는 해의 어느 날인가 나는 또 따로 불려 가서 인신공격을 당하였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꺼이꺼이 토해내는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그 상황에서도 그에게 전화한 나란 여자...
내가 이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으면 정신을 차리고 달라질 거라는 허왕된 꿈을 꾸었던 걸까...?
그런 후부터 나는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니 받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상처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는 엄마였고 아이를 지켜야 했는데
더 이상은 아이를 지킬 수 있는 힘까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나를 지켜야 했다.
아빠의 기일이 지났고 추석이 지났다. 나는 나의 자리를 지켰다.
저런 사람이 너의 조부모이다를 까발리고 싶지 않았다. 아이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었다.
어김없이 10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숨 쉬는 마네킹처럼 명절도 했고 제사도 했다.
이젠 밖에서만 보면 좋겠는데 어김없이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편은 또 그녀의 아바타처럼 물었다.
"아빠 생신 어떻게 할까 간단하게 미역국만 끓이지 뭐. 가족끼리 하는 거니까."
저 레퍼토리는 10년째 바뀌지 않는다.
더 이상의 다툼의 감정을 아이에게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 나만 참으면 된다.
내가 참으면 내가 괜찮은 척을 하면 아이는 좋은 아빠 좋은 조부모를 기억할 수 있어.'
매일매일 시도 때도 없이 다짐했다.
그래서 그날도 생일상을 차렸다.
형식적인 시간을 보낸 후 그들은 우적우적 맛있게도 접시를 비웠다.
나는 음식들이 쳐다보기도 싫어서 다 싸서 가는 길에 보냈다.
그리고 그 사건. 바로 그 사건.
다음 날이었을까 다다음 날이었을까.
바쁜 아침시간 아이의 아침밥을 먹이고 있을 때 또 전화가 왔다.
혼자 있을 때는 받지 않고 남편과 있을 때 스피커 폰으로 받았던 나는 매우 불안했지만
여러 번 울리기에 스피커 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폰으로 하면 아들이 듣고 있어서 막말을 하지 못했었다.
그럼 시모는 말을 빙빙돌리다가 어물정 끈고 아들 없는 시간에 전화를 다시 했고 난 받지 않았다.)
아이가 있는 곳에서 방심하고 받은 그게 잘못이었다.
"......"
"여보세요!!! 너!! 왜 전화를 받고 말을 안 하니?"
"네... 지금 아이 아침 먹이느라 바쁩니다...."
"집에서 노는 애가 뭐가 바쁘니. 전화가 갔으면 콜백을 해야지. 왜 씹니? 문자도 씹고 전화도 씹고. 니 부모한테 그렇게 배웠냐??"
"..........................."
"여보세요!! 너 왜 대답을 안 해???"
"..... 지금 아기랑 있습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아이는 언성이 날카롭게 들려오자 네살빼기 아기는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지금 아이랑 있어서... 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말을 끈고 시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야!!!! 너 왜 그따위로 말해?? 어디서 어른 문자를 씹어? 어디서!!
어!!??? 이 개 같은 년이!!!!!!!!!!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디 있어!!!!!!
이런 망할!!! 이 개 같은 게 이! 개 같은 게!!!!!!!
니 부모가 그렇게 가르치디???
그렇게 가르쳤어?? 이 개 같은 년이!!!"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얼른 스피커폰을 껐다. 손끝이 바르르르 떨렸다.
얼른 아이를 보았다. 아직 어려 단어는 해석할 수없지만 아이도 사람이니 분위기를 감지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시아버지는 또 소리쳤다.
"왜!!! 너 할 말 있냐?? 할 말 있어?????"
"네. 어머니가 저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셔서 제가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를 따로 불러 한 말은 쏙 빼놓고 본인이 한 행동도 쏙 빼놓고
여우짓을 하는 걸 알았었고 굳이 무식하고 경박스러운 말을 가진 그들과 말을 섞고 싶지가 않았다.
근데 그날은 내 아이 앞이라서 내가 당하고 참고 있는 것만 보일 수가 없어서 이야기를 했다.
"문자로 한번 틱 날리고 그래서 그런 거 아니냐????!!!!!! 한번 말해서 안 되면 여러 번 노력을 해야지!!!!!!"
"네 아버님. 제가 애 따라다니느라 바쁘긴 한데요.
만나서도 하고 전화로도 하고 문자로도 하고 여러번 다 해 봤습니다."
"어험.. 그래. 너.. 흠.. 지금 물리치료 가는 길이니까 끊는다."
당황하신 시아버지는 어버무리며 전화를 끊었다.
헌데
소리가 너무 커서 다 들어버린 아이 앞에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펑펑 오열하는 모습까지 보여주게 되었다.
아이에게 이 모든 것이 너무 미안했다.
난생처음 듣는 욕과 행패에 너무 치욕스러었다.
아빠의 빈자리가 그리워서 더 서러운 눈물이 흘렀다.
그날 이후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네가 전화를 받지 않고 문자질만 해대니 화나서 그러지!!"
라는 남편의 말에 남편에게도 모든 정이 떨어졌다.
온갖 수모에서도 아이 아빠라는 것이 있었는데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 일 이후 온갖 자잘한 것들을 남편을 통해서 떠보게 시킨 뒤,
나에게 다시 말하고 강요하던 그분들의 연락은 없었다.
득달이처럼 손녀생일상도 받아 드시던 분이
하나밖에 없는 장손녀의 생일에는 문자 한 통도 없었다.
그동안 별 별것들로 괴롭히며 악착같이 받아 내고 하던 연락을
그 난리를 친 후 본인 아들에게 어디냐고 확인할 뿐 나와 아이에게 어떤 사과의 말도 없었다.
(그 와중에 내가 당신 아들돈으로 호사라도 누릴까 봐 걱정이 되셨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내 아이는 조부모의 축하도 받지 못 하고 생일이 지나갔다.
모든 대소사를 분명히 의사를 전달받고 원하는 대로 해도 몇 주전부터
나를 멸치 볶듯이 득실득실 볶아대던 시댁이 사라졌다.
더 놀라운 건 아이 생일 한 달 뒤인
본인 아들 생일을 안 한다는 소식에
본인 아들 생일에 못 오면 전 주에 들리라는 통보를 받았다. 생일에 집착는 시모는 내 자식 생일은 날리더니 본인 자식 생일은 그 와중에도 챙기셔야 했나보다.
남편은 예전부터도 어리석었지만
여전히 눈치 없고 염치없이 나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할 거냐고...
(늘 나의 탓으로 돌리기 위해 선택을 넘기는 행위... 치가 떨린다..)
지금의 나는 전혀 이혼 준비가 되지 않았고
아이를 지킬 돈도 비빌 언덕도 없으니 내가 불리한 일은 만들지 말아야 했다.
이혼 소송이라는 게 참 억울하고 더럽게 풀리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증거 없는 이 싸움에 굉장히 두려웠다.
시부모의 집에 도착했을 때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방문 밖의 남편의 존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날은 이상하게 꼭꼭 닫던 방문을 손바닥만큼 열어놓고 입을 열었다.
시모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 네가 오해다. 개 같은 년이라고 하지 않았다.
개 같은 거라고 했다. 미안하다.
남자가 설거지하는 거지 아버지도 다 한다.
내가 언제 상상만 해도 부들부들 떨린다고 했니.
그런 말 한적 없다. 내가 이렇게 사과한다.
성경에 사랑장에 보면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니 네가 사랑으로 덮고 이 용돈을 받으면 나는 네가 용서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블라블라 블라.......
시부는
내가 많이 생각했고 어리석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 부분은 감정조절을 하지 못하고 부끄럽게 생각한다.
가족끼리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이 있다
하지만 가족은 다 사랑으로 덮고 더 잘 되라고 하는 이야기니
블라블라 블라......
요지는
우리가 사과할 테니
올해가 가기 전에
네가 사랑으로 덮었으면 좋겠다였다.
즉, 내 마음이 불편하니 네가 풀어라였다.
나는
"그건 아버님 어머님 생각이시고 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라고 의사를 전달했다.
시모는 9년 만에 난생처럼 두터운 봉투를 내밀었다. 백만 원이었다.
"저 부담스러우니 이런 거 주지 마세요. 주려거든 아범한테 전달하세요."라고 하고 나왔다.
내 외투에 그 봉투를 찔러 넣었다.
끝까지 참.. 본인들이 불편하니
나의 의사는 상관없이 행동하시는 모습이 어른이라 대우하던 감정까지 다 사라지게 해 주었다.
이 사람들 내가 지금 거지로 보이는 걸까...
정말 돈만 보고 사는 사람처럼 살아봐야 이들이 정신을 차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9년 동안 밥상을 차렸다고, 내 생일이라고, 명절이라고, 애 생일이라고
용돈을 주거나 수고비를 주지 않았다.
고맙다거나 잘 먹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점점 사이가 안 좋아지니 오만 원을 주었고
나의 마음이 점점 무너져 엉망이 되자 이십만 원을 주었다. 그 마저도 일년에 한번 정도 있는 일이였다.
아마도 그때가 8년 차였나 7년 차였나.. 오십을 주었다.
일 년에 한 번이지만 큰 변화인가..?
이건 딴 이야기이지만 남편이 나 몰래 용돈을 계좌로 주고 있었고 그들의 대출금도 우리가 갚고 있다.
그런 그들이
그 사건 이 후로는 아이명목으로 백만 원을 줬다.
똥 씹은 표정과 감흥없은 마음의 소리를 말하며
내가 돌려주어도 꼭 내손에 넣어줬다.
본인 아들 보라고.. 본인 아들 들으라고..
그렇게 나의 9년의 생일상차림은 막을 내렸다.
난 더 이상 상을 차리지 않는다.
내 자식도 해달라는 것과 미역국만 끓이고 본인 먹고 싶은 곳을 데려간다.
난 이제 내가 아플 것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 나를 지키려고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