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소심해서 그래

다 네가 오해한 거란다.

by 몽운

나에게는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 열 달 정도의 신혼생활이 있었다.

그 1년은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도 그 더러운 기분은 남아서 아직도 나에게 찹찹함을 준다.

결혼식 이후에 돌아서니 시댁행이었고

돌아서니 시댁 행사였다.

또 돌아서니 명절이었고

또 도라서니 시댁 제사였고

또 돌아서니 명절이었다.

사계절을 지난 후 나의 모습은 아주 분명하게 정의되었다.

만만한 동네북.

시댁의 욕구해소통.

빗 좋은 개살구.

다들 인정을 하진 않더라만 사실이었다.

시부모는 맏며느리 대우는 하나도 해주지 않고 맏며느리 행사를 하길 원하셨다.

남편은 어차피 내 일이 아니니 네가 알아서 해라였다. 어떠한 방패도 되어주질 않았다.

그러니 손아래 서방님과 동서에게도 또한 우스운 존재였다.

내가 오해한 것일 수도 있겠지... 그때는 시댁 갈 생각만 해도 악몽으로 밤 잡을 설치고 욕을 하며 싸우다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깨곤 했다.

나의 편도 하나도 없는 전장에서 싸워야 했다.


아주 소소한 것 들이였다.

예를 들면 서방님네 아이들은 자주 아파서 함께 만나지를 못 했다.

(확인하지 않았지만 주로 감기였다.)

근데 나의 남편은 죽어라 주말을 시댁에서 보내려 했다.

혹시 오는 날이 있어도 서방님네는 와서 먹고 설거지하고 곧장 일어서기에 3시간 이상 머무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남편은 한숨 자고 가라면 자고 가고 먹고 가라면 어물정 먹고 갔다.

나는 기다리는 시간 동안 욕받이와 비교와 무수한 모욕적인 말들을 들어야 했고

또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하루가 끝이 난 후에야 해방이 되었다.


명절에는 그의 큰집으로 인사를 갔는데 엄청난 설거지를 해야 했다.

그 큰집에는 아직도 내가 인사를 드리는 유일한 가족인 큰 형님이 있고

(참 신기하게 전혀 관련이 없는 며느리와 며느리의 만남인데 가장 의지되는 존재라니)

개념이 없고 이상한 둘째 형님이 있었다.

그녀는 말하는 것이 참 이상했다. 그의 남편. 즉 나의 남편의 사촌형 또한 말하는 게 참 개념이 없고 무례했다.

그들은 본인들 행동은 생각지도 않고 타인에게 무례한 질문과 말을 하는 부부였고

집안에서도 대 놓고 말하지 않아도 그냥 저러는 애들이었다.

그 무개념 둘째 형님은 동서를 꽤 좋아했나 보다.

첫 명절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한복 차림으로 하고 있었다.

"동서 동서가 작은 어머니한테 이런 거 너무 개념 없는 거라고 말해야지. 두 끼나 먹고 가면 어떻게 해. 명절에는 한 끼만 먹고 일어서야지~."

의자에 앉아서 큰 형님도 가만히 있는데 본인도 못하는 말을 몇 달 되지 않은 나에게????

그러고는 내가 보는 앞에서 명절 선물은 나누어 주었다.

내 것은 없었다.

시어머니는 앉아서 나는 제사음식 만들기 진짜 싫다면서

나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시키셨고

(음식은 큰집 큰 형님이 늘 다 하셨다.)

큰 형님께서는 조용히 칼질이나 손 가는 것들은 그만하고 앉아 있으라며 일거리를 가져가셨다.

중요한 것은 남의 귀신들을 위해 일만 하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들의 말들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기분이 교묘하게 더럽다고. 성격이 이상하다고.

남편은 동서와 형님이 별 이야기 한 것도 아닌데

또 별거 아닌 걸로 기분 나빠한다며 타박을 했다.


제사 때는 큰집 딸들도 개념 없는 부부인 큰집 둘째 내외도 없는데

시아버지는 죽자고 아들들을 집합시켰다.

둘째 아들은 회사 다닌다며 사업하는 첫 째 아들을 오라 가라 데려가라 데려줘라

개인 비서처럼 사용했다. 남편은 그러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본인 부모에게는 거절이 없는 그였다.

큰 형님께서 그 많은 일을 다 해놓으면 내가 가서 조금 돕는 거라 일은 힘든 것이 없었다.

가서도 설거지지옥은 계속되었고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두어 번 남자들이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설거지 지옥보다 시어머니의 입방정이 나를 괴롭게 했다.

시어머니는 계속 본인이하 더 일을 시켰고

큰 형님은 앉아서 먹고 놀라고 오는 것도 힘든 거라고 하셨다.

그 자리에는 언제나 동서는 없었다.

시부모는 나무라거나 동서를 원망한 지도 않았다.

남편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때로는 서방님이 안 온 적도 있었다.

일 때문이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도 동업 상태였다. 그런 식으로 일을 하니 우리는 아직 이 지경이고.

서방님은 미국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거겠지 싶다.

아까도 말했지만 서방님은 교통정리를 참 잘하는 분이셨다.

본인이 자를 건 자르고 말할 건 하니 시부모는 그들에게 훈수를 둘 수가 없었다.

언제나 시댁에 머무는 시간은 3시간이었다.

한 번은 또 제사로 큰집을 가는 길이였다.

동서에게 첨으로 문자를 보냈다.

"동서 잘 지내고 있지요? 아이들 키우느라 정신없을 것 같아요. 잘 지내다가 얼굴 봐요."

큰집에 도착해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데

서방님이 들어왔고 그날은 동서도 애들과 함께 왔다.

동서는 들어보면서 안방으로 아이 둘과 들어갔다. 애들 밥 먹이게 계란프라이를 해달라고 했고.

그리고는 갈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서방님은 평소 인사밖에 안 하던 분이었으나 그날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형수님 일찍 오셨나 봐요.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라고 했다.

"????????????????????????????"

왜 일찍? 왔냐니.....집에 와서 내린 결과는 '내가 문자보내서 눈치주는 거 였나보군.'이였다.

시어머니는 서방님에게 애 포대기라도 가져와야 부엌에 나오지라고 하니 서방님은 울그락불그락하며

"포대기는 무슨 포대기야. 애 데리고 어떻게 부엌을 들어가요.!! 아! 됐어요!!."라고

짜증 나고 신경질 난 얼굴로 받아쳤다.

시어머니는 한마디도 못 했다. 그들에게.


첫째는 효자이고

둘째는 애처가인

덕분에 시어머니는 시집살이의 모든 한을 나에게 풀고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그에게 한 적이 있다.

당신이 나를 그렇게 보호하지 않고 우습게 보니까 손아래 사람까지 그 딴 소리를 하는 거고

시부모도 나에게 함부로 하는 거다.

당신도 나를 세워 줘야 하지 않냐고.

그는 말했다.

몇 번 하지도 않는 거 형님이 고생이지 네가 무슨 고생이냐.

재수 씨가 왜 그런 소리를 하냐.

니 성격이 이상한 거다.

사사건건 다 꼬아서 생각하는 거 아니냐.

우리 엄마가 그런 소리도 못 하냐....

그 모든 말 중에

네가 고생이 많았다. 내가 몰랐다. 미안하다. 신경 쓸게 등등은 한 마디도 없었다.


모든 시댁과의 상황은 부부사이에 균열을 주었다.

교통정리를 못하는 감정의 분리와 독립이 되지 않은 우선순위를 모르는 그는

시댁과의 골을 더 깊어지게 했다.

어느 곳 하나 내가 회복을 할 수 있는 틈이 없었다.


아이를 낳은 후 산후우울증으로 상담과 약물 치료 병행을 하게 되었었다.

그때 도저히 못 견디겠어서 이런저런 말들을 한 적이 있다.

의사 선생님의 조언으로 솔직하게 말은 한 것이다.

시어머니는 나를 따로 불러 식당을 데려갔다.

그때가 처음으로 밥값을 내신 날인데.

그 말들이 가관이었다.

"네가 그렇다고 해서 내가 생각을 많이 해 봤다.

우리 교회 권사님도 매일 아프다고 하는 권사님이 있어.

근데 그 사람은 같은 말을 해도 다 기분 나빠하더라고. 꽁하고 소심해서 말이야.

네가 상처받았다고 말한 거 나는 그런 적이 없거든.???

다 네가 오해한 거야.

내가 그런 적이 없는데 네가 소심해서 오해한 거다.

기분 상했다면 풀어라. 네가 뭐가 모자라서 우울증이니.

얼른 기운 차려서 애 키우는데 집중해야지.

네가 다 오해한 거니까 마음 풀어라 알겠지?

소시 하게 그렇게 생각하면 네가 사는데 도움이 안 되니까 네가 고쳐야지."

그 말을 한 후에 며느리를 달래주는 멋진 시어머니라고 생각이 든 것일까.

뿌듯하게 활짝 웃으면서 맛있게 밥을 드셨다.

그 소리를 듣고도 나는 한마디를 못 할 정도로 깊은 우울감에 더 잠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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