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진짜와 가짜

마중물 한 바가지

by yukkomi Mar 28. 2025

저는 오랫동안 불안 장애를 갖고 살았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몸으로도 나타나 항상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았고, 긴장으로 근육이 뻣뻣하게 경직돼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저를 제일 불안하게 한 건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제가 '하나님' 때문에 죽어가던 과정과 '하나님' 때문에 살아나는 과정을 한번 나누고 싶었습니다.


저에게 떠오르는 몇 가지 어린 시절 기억이 있는데, 저는 겁이 많고 소심한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 기질적으로 꽤나 예민한 아이였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저 스스로 순종적인 아이가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열심히 배우고 좋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애썼는데, 배워도 소유해도 메꿔지지 않는 공허함이 저를 불안하게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인간의 연약함은 누구보다 쉽게 인정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양'이라는 비유에 깊이 동의했습니다.

얼마 전 다시금 양에 대해서 찾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과 너무나 비슷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습니다.

새로 알게 된 점을 몇 가지만 정리해 보면


1. 연약함


기본적으로 양은 온순합니다.

목자 밑에서 편안하고 배부를 때는 다른 양들과 사이좋게 잘 지냅니다.

하지만 너무 연약해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양은 시력이 나쁩니다.

시야각(270~320°)은 넓어서 항상 주위 상황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보이는 게 많으니 겁이 무척 많습니다.

하지만 양은 초점 조절을 할 수 없어 물체가 또렷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풍경화와 같이 주변 전체가 보입니다.

양이 거리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코끝 바로 앞에 놓인 사물뿐입니다.

그래서 양은 넓은 시각으로 계속 무리의 상황을 관찰하며 안정감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은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 고립되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사회적 인간)


양은 몸에 비해 하체가 너무 약해서 위기 상황에서 서로 허둥거리다가 '벌러덩' 뒤집어집니다.

양은 등이 일자라 아무리 용을 써도 스스로 못 일어납니다.

누운 상태를 몇십 분만 지나도 가스가 복부에 차면서 죽어버립니다.

목자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일어나도 중심을 잘 못 잡아서 한참을 잡고 있어 줘야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양은 잘 속아서 늑대에게 잡아먹히고, 늑대에게 공포감을 느끼니 비슷하게 생긴 양치기 개만 봐도 끌려다닙니다.

양처럼 저도 겁도 많고 눈치 보고 잘 무너지고 회복도 더딘 사람입니다.

트라우마도 가지가지여서 트라우마 부자로 살았습니다.ㅎㅎ


양은 시각에 비해 청각이 뛰어나 소리로 소통합니다.

소리로 소통하며 연령과 상황에 따라 다른 소리를 냅니다.

하지만 너무나 고통스러울 때는 양은 오히려 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양은 목자의 소리와 다른 사람의 소리를 구분할 수 있는데, 길들여진 소리를 목자로 여기고  따라다닙니다.

저도 여러 관계 속에서 계속 믿을 만한 한 사람을 찾았고, 그 한 사람을 믿고 의존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다 신뢰가 무너지면서 아무하고도 소통하지 않고 제 생각에만 갇혀 있었습니다.


양은 주기적으로 털을 깎아주지 않으면 털이 너무 길게 자라 더위를 견디지 못할 뿐만 아니라  털 무게에 스스로 눌려 제대로 활동하지 못합니다.

털들이 항문을 막는 경우도 있어 배변을 하지 못해 죽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또, 배변을 매우 자주 해서 집에서 기르기 힘든 동물이기도 합니다.


저도 스스로 무리한 책임감에 눌려 살았습니다.

죄를 안 지으려 정말 노력했지만 끊임없이 마음으로 죄를 지었고 죄책감에 눌려 살았습니다.

죄를 안 지으려다 독이 안으로 쌓여 깊은 병들었습니다.


2. 가축화 - 군중심리/ 의존성


양은 무리 짓는 습성이 있어서 몇 마리만 있어도 서로서로 무리 지어 삽니다.

또 무리에 지배 서열이 있어서 우두머리만 잘 다루면 자동으로 무리 지어 따라다닙니다.

겁은 많고 강하지는 않으니 우두머리를 믿고 스스로 따라다닙니다.


저 또한 저를 믿지 못하니 믿을 만한 대상을 항상 찾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누구보다 진심이었습니다.


3. 자기중심적 성향


양이 온순하기만 할 것 같지만 자기 분을 못 이겨서 다른 양이나 인간을 들이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세에는 양치기가 양에게 죽는 경우가 종종 있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 자기 생각밖에 못 해서 목자가 없으면 양은 각자 자기 먹이를 찾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멋대로 가버린다고 합니다.

잎만 뜯어먹는 다른 가축들과 달리 뿌리까지 통째로 뽑아 먹기 때문에

한 곳에 계속 머물거나 목축지가 좁으면 생태계가 금방 파괴됩니다.


저 또한 겉으로는 겸손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수많은 죄를 지었고, 모든 판단의 중심에는 제 이기심이 있었습니다.


4. 회피와 포기


도축하기 전에 동물을 데려와서 묶어 놓으면

소와 염소는 죽기 직전까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오자마자 엄청 우는데,

그냥 단순히 우는 것이 아니라 한 맺힌 소리로 운다고 합니다.

그런데 양은 다른 양이 죽어도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가만히 묶여서 풀만 뜯고 있다가 주인이 칼을 목에 대는 순간, 그제야 죽는다는 것을 알고 "메~" 한 번 하고 죽는다고 합니다.


저도 사실 수많은 생각을 하지만

너무 생각하기도 괴로운 것은 생각만으로도 아파서 될 대로 돼라 하고 회피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제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철저히 인정했기에 이끌어 줄 목자가 필요했습니다. 의존적인 저는 교회 생활을 열심히 했는데, 교회를 다닐수록 더 불안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목자는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들은 수많은 설교와 , 자아로 받아들인 성경 말씀을 저의 상처와 이기심, 두려움으로 재해석하고 조합해 낸 거짓 목자, '가짜 하나님'이었습니다.

거짓 목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에게 다가와, 제가 받고 싶던 위로를 주며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불안한 저는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끼며 ‘여기에 붙으면 되겠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점점 저의 약점을 잡아 저를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목자의 권위를 가지고 성경 말씀을 들이대며 내 선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저의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조목조목 설득했습니다. 성경 말씀 앞에서 저는 항상 죄인이었고, 모질이었습니다.


제가 부당한 대우를 당하거나 비인격적인 취급을 받아 아파할 때도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네 눈의 들보는 왜 보지 못하느냐”라며 옳은 소리로 저의 감정을 모두 눌러버렸습니다. 두려워하는 저에게는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형벌이 임한다”라며 이중으로 눌렀습니다.


또한, 계속 희망 고문을 했습니다. 제가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고,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거라며 모든 것의 원인을 저한테 돌리며 죄책감을 심어 놓았습니다.


계속 부정당하고 야단맞은 저는 자존감이 파괴되고, 아무것도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자기 부인’이라는 이름으로 저의 자유 의지를 다 빼앗아, 당근과 채찍으로 돈도, 시간도, 몸도 다 목자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거짓 목자는 이중 메시지로 저의 자아를 짓밟고 심리적으로 종속시켰습니다. 또한, 무리한 과제를 주며 저를 끝없이 시험했습니다. 시험을 이겨내지 못할 때마다 저는 제가 얼마나 모자란 인간인지 점수 매겨지며 수치심을 느꼈지만, 거짓 목자는 “다 너를 사랑해서 완벽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 훈련하는 것이니 조금 더 해봐라”라며 따뜻한 말로 저를 떠밀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 “넘어지면 안 된다”, “위험하니까 하지 말라”라고 붙잡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너무도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거짓 목자에게 사육받은 저도 어느덧 거짓 목자의 길로 조금씩 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거짓 목자에게 짓눌려 무기력해지고 그렇게 아팠는데, 저도 모르게 사랑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다른 사람의 얘기에 공감하기보다는 옳은 소리를 했습니다. 이중 메시지를 주며 가족을 은근히 통제했습니다.


그런데 제 깊은 마음은 제가 생각한 답이 틀릴까 봐 두려워서, 저도 모르게 저의 생각을 주입했던 것 같습니다. 망할까 봐 두려워서 통제도 했다가, 포기도 했다가를 반복하다 보니 일관성 없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망하지 않고 싶다는 마음이 이상하게 변질되어 흘러나왔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숨 막히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점점 멀어졌고, 저는 외로워졌습니다.


사실 아직도 그런 속성이 저에게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아빠가 잘 치료해 주시는 중입니다.


거짓 목자의 심리적 지배에 짓눌려 무기력해져서 시체처럼 되어 있을 때, 나를 오랫동안 기다리시던 참목자를 만났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그리고 기적 중의 기적은, 시체 같던 내가 예수님의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 때문에 '만들어진 하나님'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목숨으로 사는 게 아니라 목자의 영원한 생명을 받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거짓 목자의 수많은 묶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습니다.


참목자가 나를 대하는 방식은 거짓 목자와 너무 다릅니다.


참목자는 저를 사육하는 게 아니라 양육하십니다.

군림하려고,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것이 아니라, 제가 아빠의 주인공으로 잘 살게 하려고 키우십니다.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저를 위해 매일매일 종이 되어 주시고, 목숨 바쳐 사랑해 주시는 세상에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목자입니다.


참목자는 저의 앞에서 휘두르지 않으시고, 제가 자율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묵묵히 뒷바라지해 주시며 믿고 기다리십니다.

참목자의 울타리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습니다.

아빠의 울타리는 양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지, 양을 가두는 울타리가 아니었습니다.

목자의 보호 아래 저는 점점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합니다.

많이도 넘어지고, 길을 잃기도 합니다.

때로는 절벽에서 떨어져 전에 살던 사망의 골짜기에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또 다른 양들과 싸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목자의 막대기가 나를 지키고, 목자의 지팡이가 나를 또 끌어올립니다.

그리고 품에 안아 주십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여러 번의 선택과 경험 가운데 '가장 좋은 것(생명)'을 선택하는 자유의지가 회복되는 걸 느낍니다.


참목자는 저를 너무나 인격적으로 대해 주십니다.

저를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대해 주시니 죄책감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집니다.

애완동물 취급하지 않으시고, 목자와 동등한 인격체로 대해 주십니다.

저를 깊이 신뢰하시고, 존재 자체로 끊임없이 사랑해 주시니 불안했던 마음에 안정감이 쌓여갑니다.


거짓 목자는 당연히 느껴야 할 분노나 슬픔도 죄라고 억눌러 놔서 감정이 분열되다 못해 파열되어 있었고, 폭발하기 일쑤였는데,

참목자는 제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을 깊이 존중하시고, 폭발한 감정도 잘 처리해 주십니다.

하고 싶은데 못 해서 자책하고 있는 저에게, 안 하고 싶은데 하고 있는 저에게

"네가 그러는 건 다 이유가 있어."

라고 끝없이 공감하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어려서 '애늙은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지만, 눈치를 봤던 거지 성숙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도 내면은 하나도 자라지 않은 아이로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저의 감정을 잘 다독여 주시니 감정이 안정되고 성숙해집니다.

널뛰던 감정이 안정되니 조금 더 이성적인 판단을 하게 됩니다.

지금은 불안감이 많이 치료되어 장애 수준은 아닙니다.


거짓 목자는 계속 시험하지만, 참목자는 제가 시험당할 때마다 모르던 아빠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십니다.

가르치기보다는 스스로 깨닫게 하십니다.

몰랐던 걸 알게 되는 건 행복한 일이라는 걸 새로운 경험을 통해 배우고 있습니다.


사실, 틀려도 괜찮고 잘 몰라도 괜찮다는 게 제일 좋습니다.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에 눌려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는데,

요즘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자유 속에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봅니다.

제 선택이 틀려도, 잘못돼도 저를 책임지고 키우시는 아빠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동안은 거짓 목자에게 하도 야단만 맞고 자라서

야단맞아야, 빌어야 마음이 편할 때도 있었습니다.

거짓 목자의 소리에 하도 오래 길들여져 참목자의 사랑의 소리를 못 들을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는 제대로 된 사랑을 더 많이 받아야 할 존재이지, 낙제점 받고 버려져야 할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생명을 더 달라고 아빠 품에 더 안깁니다.


참목자는 저의 예민한 기질에 맞게 너무 놀라지 않도록 맞춤 양육을 하십니다.

저를 예민하다고 하지 않으시고, 저를 섬세하게 맞춰 주십니다.

이런 아빠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경험하다 보면

제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명의 자존감'이 쌓이게 됩니다.


아빠가 천지창조 때 "보시기에 좋았다."

는 말에 저도 동의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원래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어진 존재였던 겁니다.


안정적인 양육 밑에서 저는 비로소 진짜 '나답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남과 비교하며 사느라, 남이 원하는 대로 사느라

제가 어떤 사람인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하고 살았는데,

조금씩 저로 살아보니 너무 행복합니다.


무섭고 죄스러워 한없이 위축됐던 심판자 하나님,

가까이 갈 수 없던 권위적인 아버지 하나님이

이제는 친아빠처럼 든든하고 친구처럼 편하게 느껴지는 관계로 살고 있다니,

이것이 기적 중의 기적이고 '내가 하나님의 친딸'이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건 다 저를 기다려 주시고, 구원하시고, 인격적으로 양육해 주신 아빠가 하신 일입니다.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