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이 애초에 없었어.
알람 없이 일어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아무리 늦게 자도 눈이 번쩍 떠지는 이 마법 같은 순간이 내게도 왔다.
젊은 날, 그렇게 새벽형 인간이 되고 싶었는데 이게 이리도 쉽다니!
(나이 먹으면 좋은 점을 찾아 적어두고 있다. 기억하려고. 불평 안 하려고. 새벽에 일어나는 것도 추가)
밤 같은 새벽이다. 일어날까 누워있을까? 에 대한 진지한 1분 고민.
내 방 불을 환히 켰다. 바깥을 보니 일어난 사람도 별로 없는듯하다.
이후 또 진지한 고민의 시간이 주어졌다. '어젯밤 하지 않은 설거지를 해야 하나 어질러둔 책상을 정리해야 하나? 침대 옆 옷무덤들을 파헤쳐 없애줘야 하나?' 인생이 그렇듯 보기에 답은 없었다.
"목욕이나 가자."
우리 엄마를 필두로 아줌마들이 왜 목욕탕을 가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나였다. 그런데 이제 내가 달 목욕을 하는 아줌마가 되었다. 최근에 내가 재미있어하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다. 베이킹, 요가, 짐볼 운동, 헬스, 냉열탕 목욕법. 그중 가장 좋은 것이 냉온욕이다.
목욕의 시작은 피부 가려움과 어깨통증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러다 열탕과 냉탕의 참 맛을 알게 되면서 피부 문제가 아니라도 나는 매일 목욕가방을 들고 기분 좋게 탕에 들어가 앉는다.
처음 열탕을 들어갔을 때는 내 몸이 샤부샤부 고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군가 나를 건져서 쌈 싸 먹어도 될 만큼의 살짝의 붉게 익혀진 상태. 그다음은 바로 냉탕으로 직행! 내 몸에 남은 열기와 냉탕의 냉기가 만나는 순간, 그야말로 태풍 구름이 형성되는 것 같은 세포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내친김에 얼굴을 냉탕으로 담가버린다. 내 볼을 뜯어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정신이 바짝 차려진다. 아래위로 몸을 둥실둥실 구름처럼 떠올려 보면 어느샌가 나는 찬물에 떠다니는 낙엽 같은 부유물이 되는 경험도 한다. 다시 용광로 같은 열탕으로 직행!
사람을 잘 안 만나는 나는 이렇게 논다.
눈을 감고 물의 온도와 내 몸의 반응을 느끼면서.
오늘 새벽에는 눈을 감고 열탕 속에 있자니 내면 깊숙이 가라앉았던 생각의 찌꺼기들이 몸의 각질과 함께 떠올랐다.
"나는 왜 그동안 이렇게 자유롭지 못했지?
무엇이 나를 자유로이 떠오르지 못하게 묶고 있었던 건가?
자녀, 남들의 시선, 세상의 기준, 사람들의 인정, 돈, 성공, 발전에 대한 강요, 성장 압박…
나를 묶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움직이지 못하게 나를 가라앉혔던 실체,
남편도 가족도 내 성격도 상황도 트라우마도 아니었다.
크고 작은 돌덩이들을 끌고 들어와 자꾸자꾸 올려놓은 나.
지나갔다.
오늘, 지금부터, 이 자리에서
자유로움 속으로 유영해 가자.
목적지 없이!
그림출처 Eric Ze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