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환자를 둔 보호자의 하루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 이전에 '보호자'라는 개념은 남 일, 혹은 힘들겠다 정도 였다. 지금의 나에게 '보호자'는 내 미래를 저당잡힌 불안이 더해진 책임자다. 중증환자의 보호자가 되고 나서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은 죄책감, 그 다음은 회피였다.
1. 최근 수신목록을 가득 채우는 병원 전화번호
보호자가 되니 병원에 달려가야 할 일들이 정말 많다. 일단 병원에서는 정말 다양한 번호로 전화가 온다. 처음엔 뭣도 모르고 처음 온 연락처를 '중환자실' 이라고 저장했다. 그리고 두 번, 세 번 이후부터는 지역번호와 앞자리만 보고 병원임을 파악했다.
많은 전화번호 만큼이나 전화가 오는 횟수도 많다.
띠리리리.
"보호자님, 어머님이 무의식적으로 수술 부위를 건드려서 장갑을 씌우려고 합니다."
띠리리리.
"언어 치료를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동의 가능하실까요?"
띠리리리.
"혀가 말리지 않도록 조치를 해야 하는데…"
무슨 일로 전화를 하는지 알 수 없기에 병원인 듯 싶으면 일단 받고 본다. 회의 시간에도 나가서 받고 일을 하다가도 받는다. 그리고 그 동의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도 급해 보이는 목소리에 일단 동의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2. 병원에서 생각하는 보호자 = 언제든 올 수 있는 10분 대기조
그 다음은 "오늘 오실 수 있나요?" 또는 "바로 오실 수 있나요?" 라는 전화. 아무래도 병원에서는 보호자가 10분 대기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의사 면담을 당일 오후로 잡는 일도 허다했고 (오전에 전화해서 알려준다) 중환자실에서 나와 준 중환자실로 이동하는 일정도 서 너시간 전에 알려줘 당장 병원에 오라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24시간을 붙어있어야 한다고 통보하기도 하니 정말 난감해서 자리에 돌아와 한 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최근에는 전원을 위한 서류에 동의를 위해 당일날 내원을 하라고 하거나 서류가 준비 되었으니 가능한 빨리 와서 수령하라고 해서 당황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중환자 보호자가 되니 내 일은 뒷전이고 늘 환자를 위해 대기해야 하는 상태가 된다. 가족들이 없었더라면 일상생활이 정말, 정말로 어려웠을 거다.
3. 내 멘탈은 누가 케어해주나요?
거의 매일 병원에 가서 환자의 상태를 지켜보게 되면 갖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가장 힘든 감정을 가지게 했던, 보호자가 되고 가장 듣기 싫었던 단어.
"장기전이 될 것 같습니다."
의사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말이 내게는 선고처럼 들렸다. 장기전. 그게 대체 얼마를 말하는 걸까. 한 달? 반년? 1년? 끝이 없는 기다림. 나는 그 단어가 가장 무서웠다.
계속 이렇게 병원에 매달려야 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나를 짓눌렀다. 보호자는 환자 케어 뿐만 아니라 내 삶도 책임져야 하기에 상당한 체력과 감정이 요구된다. 병원에서 환자 상태 살피랴, 간호사한테 질문하랴, 의사 면담 기다리랴, 간병인과 소통하랴. 하루하루 병원에서 요구하는 서류와 동의에 대해 알아볼라 치면 하루가 금방 간다. 그 일이 끝나는 것 같으면 바로 나의 삶이 치고 들어온다. 회사가 나를 찾고 집안일이 찾는다.
엄마에 대한 불안감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불안감도 찾아온다. 일과가 다 끝나고 자려고 누우면 쓰러지듯 잠들면 오히려 다행.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날에는 끝없는 우울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불면증에 시달린다.
어쩌면 나도 갑자기 쓰러져 지금까지의 기억을 모두 잃게 되지는 않을까, 너무 무섭고 두렵다. 어느 날에는 다음날 눈을 뜨지 못할까봐 겁이 나기도 했다. 평소 옷을 입지 않고 자는 편인데 이대로 발견될까 너무 두려워 한참 잠옷을 쇼핑하기도 했다. 다만 이 감정이 지속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생각을 조각내어 끊어 버리고, 다른 곳으로 옮기고 또 옮긴다.
4.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하는 삶에 대하여
'나 하나도 케어하기 벅차다.' 늘 입에 달고 살았던 말. 팍팍해진 상황에 나 스스로를 온전히 케어하기에도 벅찬데 타인의 온전한 삶을 위해 나의 하루를 쏟아야 하는 상황은 여전히 익숙치 않다. 하루 종일 타인을 위해 사는 삶 ... 모든 상황이 유난히 어긋나는 날이 있는데 그런 날이면 길을 걷다가 갑자기 눈물이 떨어지기도 한다.
5. 그래도 당신을 생각하기에
이게 문제다. 내 삶이 힘들어 당신을 원망하는 마음, 그럼에도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합해져 죄책감이 눈물로 흐른다.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 하루를 마감하면서 뿌듯함 보다는 허무함과 지친 체력만 남는 이 밤에 누워있는 엄마가 고통스럽지는 않을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글생글 웃고 활발하던 사람이 누워있다니 그게 나의 엄마라니, 마음 한쪽에서 조여오다 못해 저려온다.
나만 생각했다가 엄마도 생각했다가 온갖 생각이 교차한다. 우리 모두가 힘든 이 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