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엄마는 나에게 '여우같은 기지배'라고 했다.
* 오늘의 이야기는 평소보다 조금 길어요.
나는 올해 상반기에 회사를 그만두고 어학연수를 갈 예정이었다. 엄마를 만나 말하려고 했던 바로 전 날 거짓말처럼 엄마가 쓰러졌고 그 순간, 모든 게 멈췄다.
엄마의 주보호자가 되고 그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지면서 사실 억울하고 원망스러웠다. 어떻게 하필 이 타이밍에 나를 가지 못하게 막는걸까. 많이 기대했기에 처음에는 너무 억울했다. 부모님이 아프시면 옆에 있어야 할테니 하루라도 빨리 다녀오려고 했던거였는데, 엄마가 나를 한국에 묶어두고 싶었던 걸까?
어학연수를 통해 큰 변환점을 얻을 수 있을거란 기대가 정말 컸다. 같은 일을 10년 동안 하다보니 리프레시가 간절했던 순간이기에..
그러던 중 이모에게 엄마에 대해 질문을 할 일이 생겼다. 엄마의 이야기를 쓰려다 보니 엄마 생각을 계속하게 되는데 내가 대학을 다니던 때, 딱 그 때의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면회를 마치고 나오며 이모에게 그 때의 엄마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이모, 혹시 나 대학생 때 엄마가 어떻게 지냈었는지 기억나?"
"..."
이모의 대답을 듣자마자 갑자기 10년 전 어느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우리집은 유독 통금이 심했다. 저녁 9시만 되면 엄마, 아빠 할 것 없이 문자가 들어왔고 버스에서 내리면 엄마 혹은 아빠가 나를 데리러 정류장에 나와 있었다. 늘 그랬다. 그래서 귀가 약속을 어기고 12시가 넘어 귀가 하는 날엔, 자고 있던 부모님이 벌떡 일어나 거실에서 가족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그 날도 친구의 군입대로 송별회를 하며 과 모임을 가지고 새벽 1시 즈음 귀가했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가족 회의가 열렸다. 친구들은 나만 빼고 새벽까지 함께할텐데, 1시에 혼자만 일찍 나와야 했던 것도 정말 억울했는데 혼이 나야 한다니. 지긋지긋했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를 대려고 하던 나의 말을 끊은 것은 엄마였다.
"여우같은 기지배"
여우같은 기지배? 이 대사는 드라마 '왕꽃선녀님'에서 자경이를 미워하는 새엄마나 할 법한 대사인데... 길었던 가족회의에서 기억나는 말은 딱 그 한마디다. 그 한마디가 나온 이유를 십 년이 지나 이모의 입에서 들을 수 있었다.
"이모, 혹시 나 대학생 때 엄마가 어떻게 지냈었는지 기억나?"
"니 등록금 준비할려고 그 때 엄마가 하려던 일도 못하고, 일하다가 사람들한테 사기도 당하고 니 아빠랑 좀 싸웠어? 어휴 말도 마. 언니 그 때만 생각하면 불쌍해죽겠어."
그 한마디가 내게 모든 기억을 되살려냈다. 십 여년 전, 엄마는 한참 옷가게를 하고 싶어했다. 다양한 브랜드를 좋아했기에 세컨핸드 샵을 여는 것이 엄마의 오랜 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 대학등록금을 대야 했기에 결국 가게는 열지 못했다. 이모의 말은 내게 그때의 모든 고통을 떠올리게 했다.
이모는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라는게 원래 이렇게 힘든거야?"
4년을 그렇게 등록금을 대느라 고생한 엄마는 내 졸업식에도 오지 않았다. 엄마가 오지 않는 것에 대해 궁시렁 거리던 아빠만 참석했다. 등록금을 대는 것이 당연했던 아빠는 자랑스러운 딸의 졸업식이었지만 엄마에게는 고통의 순간이었으리라 .. 나의 졸업이 곧 엄마의 고통 졸업이기도 했던거다.
하려던 가게도 열지 못하고 등록금을 대어주는데 매일 밤늦게 들어오며 자유롭게 노는 딸이 얼마나 원망스럽고 얄미웠을까.. 나를 묶어두는 원망스러운 엄마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이야기를 기억해내고 퍼즐을 맞추고 나니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지금의 나처럼 하고 싶은 것이 많았을 엄마가 엄마라는 이유로 포기해야만 했던 것들에 대한 죄책감까지.
우리는 어쩜 이렇게 닮았을까.
엄마, 우리는 서로의 발목을 잡은 걸까? 아니면 서로를 지탱해온 걸까.
이제 나는 그 답을 알 것만 같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찾아가야 할지도.
엄마는 이번 주 재활병원으로 전원을 했어요. 대학병원을 떠나 재활병원으로 옮긴 것이 엄마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재활병원 의사 선생님은 그리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주지 않더라고요. 의사들은 늘 보수적으로 이야기한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으니 정말 무섭더라고요.
게다가 지금은 엄마가 와상환자인데다가 낙상 위험이 있어 1인 간병 체제로 움직이는데요. 재활병원비와 간병비를 합치니 그 비용이 만만치 않더라고요. 의식을 찾기 까지는 장기전이 될거라는데 앞으로 비용을 지출할 생각을 하니 몸과 마음이 벌써 지치는 것만 같아요...
오늘도 엄마가 기적처럼 의식을 금방 찾을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잠에 들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