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 생활은 행복하니?
나의 아들은 2018년도에 태어났다. 아들의 돌 무렵, 코로나가 발생했다. 불안이 나의 일상으로 들어온건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긴 후 오랜만에 간 요가학원에서였다. 아침 햇살이 유난히 따뜻했던, 그래서 하품이 늘어지게 나오던 봄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나와 내 아들이 이런 시대를 통과할 줄은.
그 후에 아이가 세돌을 맞이할 동안 나는 가정보육을 했다. 남편은 밖에서 열심히 돈을 벌고 아내는 아이를 정성껏 양육을 하고. 겉으로 보기엔 내가 바라던 이상적인 가족의 형태였다. 놀이터에서 아들과 놀고 있으면 지나가던 엄마들은 나를 하나같이 칭찬했다. 어떻게 이렇게 오래 데리고 있냐면서. 그 칭찬에 어깨가 으쓱했다. '그래 나는 참 좋은 엄마야' 하며 스스로를 추켜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코로나 위기를 겪으며 안팎으로 지쳐갔던 남편과 나. 그리고 그 위태로움을 몰랐을 리 만무한 90cm의 작은 생명체. 나의 아들. 그렇게 나는 '이젠 보내야겠다'라고 결심했다.
아이가 두돌이 조금 지났을 무렵 살던 곳에서 이사를 했다. 서울에서 경기도로 넘어온 것이다. 다행히 아이를 보낼 기관은 많아보였다. 문제는 어린 아이들도 훨씬 많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어린이집에 대기를 넣었다. 곧 이어 기관에서도 연락이 왔다. 하지만 거절했다. 기다리는 동안 다른 엄마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들 때문이었다. 진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혹여 맞다면 보내는 내내 불안할 이야기들. 그 후로는 사교육기관을 알아봤다. 실내에서 암벽등반도 할 수 있고 일주일에 한번씩 수영도 배울 수 있었다. 야외로도 많이 나가 자연체험도 한댔다. 하지만 비싼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그러다 숲 어린이집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아들의 첫 기관이 정해졌다. 그리고 삶의 질은 훨씬 더 높아졌다. 지친 기색으로 남편을 맞이하는 날들이 적어졌고 아이와도 잠들기 전까지 진심으로 즐겁게 놀아줄 수 있게 됐다. 제일 큰 변화는 아이였다. 친구라고는 엄마 아빠 밖에 없었는데 이젠 친한 친구 이름을 제법 알려준다. 흙밟고 뛰어놀다 오니 밤잠도 깊이 자게 되었다.
지금도 사실 나는 아이에게 내가 한 이 선택이 최선일 지는 잘 알 수 없다. 등원에 40분 하원에 50분 버스를 타고 멀리 원으로 갔다 되돌아와야 한다. 밤기저귀도 채 떼지 못한 아이가 차를 오래 타는 일이 어찌 쉬울까. 하지만 아이의 하루가 나 없는 곳에서도 추억으로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이 좋다.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저녁이 있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