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립스틱, 낡은 청자켓 그리고 나
나는 살면서 재미교포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들었다. 내가 진짜 재미교포여서도 아니고 영어를 유창하게 잘해서도 아니다. 실제로는 영어권 국가로는 여행조차 가본 적이 없었고 영어는 듣기와 읽기를 가장 잘한다. 교포 같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주범은 바로 외모다. 피부색이 까무잡잡해서 어렸을 때부터 놀림을 많이 받았다. 따지고 보면 놀릴거리가 전혀 아니지만 어린 나이 때는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다르면 놀림의 대상이 되고는 했으니까.
학생 티를 벗을수록 오해를 받는 일은 잦아졌다. 한 번은 경복궁역 편의점에서 빵을 집어 계산대에 올려놓자 나를 유심히 본 직원이 말했다.
"It's one thousand won."
이런 경험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진한 화장은 피했고 소녀스러운 옷만 고집했다. 교포라는 틀에 박힌 이미지에서 멀어지려 노력한 것이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 외모는 어디 가지 않았고 '자유로워 보이는 얼굴'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때까지 나는 사람들이 던지는 내 외모에 대한 평가에 '자유롭지' 못했다. 까무잡잡한 피부가 매력 있다는 위로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고 당연히 외모에 만족할 줄도 몰랐다.
지난번 혼자서 바르셀로나 시내를 구경 나왔을 때 위험하다는 말 때문에 미처 가보지 못한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El Raval이었다. 파견 학교에서 매칭 해준 교환학생 도우미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말하길 라발 지구는 여자 혼자서 가기에는 위험한 곳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 '마' 그리고 다른 친구도 함께 라발 지구를 가기로 결심했다. 같이 가는 일행 중에는 빵순이라 불릴정도로 빵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라발 지구에 유명한 빵집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무척이나 가고 싶어 했다. 늦은 10 월의 어느 오후, '함께라면 두렵지 않아'라는 마음을 갖고 시내로 나갔다.
10월 말의 바르셀로나는 제법 쌀쌀해 긴팔을 입을 정도가 되었다. 한국의 10월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분명 이곳보다는 추웠을 거라 확신했다. 우리는 탐험을 떠나기 전에 허기부터 달래기로 했다. 한국에서 먹던 습관 중 어디 가지 않은 입맛이 치킨에 대한 갈증을 일으켰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에서 프라이드치킨을 먹을 만한 곳은 KFC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학생 신분에 치킨이 생각날 때마다 치킨 한 마리를 거하게 시켰다면 금세 돈이 거덜 났을 것이다. 다행히도 KFC에는 우리의 갈증을 채울만한 착한 메뉴가 있었다. 바로 'El Menu del Dia(엘 메누 델 디아)'. '오늘의 메뉴'인데 6천 원 정도로 치킨버거, 음료, 감자튀김, 너겟, 텐더 치킨을 먹을 수 있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구성인가! 덕분에 욕심내지 않고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KFC에서 단란한 식사를 마치고 라발 지구로 가는 길에 Druni라는 가게에 들렀다. 다양한 브랜드의 화장품을 한 데 모아 파는 곳이었는데 우리나라에도 그런 곳은 한 블록 건너마다 있지만 이 가게에는 오로지 유럽 브랜드만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직원은 우리를 보자 적극적인 세일링을 시작했고 얼떨결에 시범 화장대에 앉아버렸다. 직원은 내게 검붉은 색의 립스틱을 추천했다. 옛날의 나였다면 당황스러워하며 민망하게 거절을 했겠지만 어느샌가 나는 대범해졌다. '오케이'를 외치자 직원은 립스틱 붓을 이용해 짓게 짓게 내 입술을 채웠다. 그 결과 깜짝 놀랄만한 입술색이 완성됐다.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같이 있던 친구들 모두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내 생각에 동의했다. 나는 그 립스틱을 사지는 않았고 오히려 '사'가 같은 브랜드의 밝은 분홍색을 샀다.
자극적인 입술을 의식하며 라발 지구에 들어섰다. 람블라만 사이에 있을 뿐인데 고딕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국적인(스페인 기준에서) 가게들이 죽 이어졌다. 주로 중앙아시아 계통의 가게들이 많았는데 간판에 적힌 언어가 주인의 국적을 말해줬다. 골목골목을 돌아보다 보니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다. 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고등학생 이야기, '그리스'였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5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을만한 패션을 소화했는데 10미터만 걸어가면 있는 람블라의 사람들과는 달랐다. 시간여행을 한듯한 기분이었고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좀 더 거리를 돌아보자 사람들의 패션이 납득됐다. 곳곳에 빈티지 옷가게들이 있었고 한때는 시대를 풍미했을 청자켓들이 제2의 전성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빈티지 가게는 무게에 따라 가격을 매긴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몇 군데를 더 둘러보다가 나름 마음에 드는 청자켓을 찾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재킷을 걸쳐봤다. 갈색 워커에 주름치마, 붉은 입술은 낡았지만 여전히 멋있는 청재킷과 잘 어울렸다.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보며 머리 가르마를 바꿔봤다. 오른쪽으로 머리를 더 넘기니 훨씬 더 빈티지스러워졌고 나도 어느새 라발 거리 위 다른 사람들과 같아졌다.
립스틱 하나로 시작된 변신은 내게 무엇이 잘 어울리는지를 알려줬다. 다른 사람들이 내가 어떤 느낌이라고 평할 때보다, 내가 감추고자 했던 걸 매력이라고 말해줄 때보다 내 눈으로 내 모습을 확인했을 때 내가 어떤 모습인지 깨달았다. 놀림받았던 옛날의 기억은 어린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일 뿐이었고 위로라고 생각했던 말은 내가 깨닫지 못한 매력이었다는 것을. 이제까지 내게 무엇이 어울리는지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리지 못했다. 어렸을 적 내가 기대했던 방향은 아니었지만 그 방향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를 알아가는 여정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