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되고 싶다는 사람

비가 그치면 겨울이 오는 줄 알았다

by 사과실

11월이 되자 바르셀로나의 우기가 시작됐다. 10월에 바쁘게 돌아다니지 않았으면 어쩔뻔했나 싶을 정도로 내리 비가 내렸다. 잠에서 깨면 아직도 날이 어두워서 아침이 아직 오지 않았나 하고 착각하는 날이 여러 번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비가 내렸고, 추위를 피해 이불로 다리를 덮었다. 침대에 기대 있으니 땅으로 내리꽂는 두꺼운 빗줄기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블라인드를 올리고 밖을 내다봤다. 빗줄기가 땅에 닿자마자 튕겨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퍼뜩 드는 생각이,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바르셀로나구나.'

과거에 보냈던 날과 다를 것 없이 느껴지더라도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를 떠올리면 평범한 순간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베개를 등에 받치고 이메일을 읽었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친구가 보낸 메일이었다. 그 친구는 내가 바르셀로나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를 물어봤고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사실 내가 걱정되는 건 무료하지 않을까 하는 거야. 생각보다 외국에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거든. 한국에서 하는 것처럼 자유롭지도 못하고 할 수 있는 거에도 제한이 많아. 너는 어떨지 궁금하다.]

3,6,9 숫자를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다. 3개월, 6개월, 9개월, 3년, 6년, 9년. 해외 생활이 무료해지는 순간이란다. 나는 이제 3개월에 들어섰고 절묘하게도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먼저 유학하고 있는 선배로서 친절한 오빠처럼 느껴지는 이메일에 설레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누구나 내 무료함을 걱정해줄 수 있지만 걱정해준 사람이 그 친구였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나는 그 이메일을 몇 번이나 곱씹어 읽었다.




그다음 날부터는 우기에도 휴식이 찾아왔다. 나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시내로 나갔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바르셀로나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타'와 갔었던 시우타데야 공원을 가기로 했다. 이제 날씨가 춥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지경에 이르렀기에 스웨터 위에 외투를 입어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우산도 챙겼다. 참으로 신기한 것이 이곳 사람들은 우산을 잘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명히 비가 오고 있고 우산을 써야 하는 빗줄기인데도 사람들은 우산을 쓰지 않았다. 심지어 뽀송뽀송한 모습으로 평온하게 페로카릴에 앉아있는 모습을 볼 때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접고 있는 내가 유난스럽게 느껴졌다. 먹구름이 내 머리 위에만 있는 게 아닐 텐데 참 이상했다.


빗물을 담아둔 공원은 한껏 무거운 분위기를 풍겼다. 9월에 왔을 때는 햇볕을 만끽하는 사람들이 잔디에 누워있었는데 2달 만에 사라졌다. 시우타데야 공원 입구 앞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렸다. 빗물 위를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난 비에 젖은 아스팔트 도로 냄새와 빗물을 스치는 바퀴 소리를 좋아한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도 설레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진다.


IMG_20141126_145616.jpg 시우타데야 공원 앞 신호등




공원을 걷고 있는데 벤치에 한 무리의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걷고 있는데 그중 한 남자가 내게 인사했다.

"Hello."

"Hello."

하나의 거짓 없이 평소의 나였다면 절대 낯선 사람의 인사에 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일행도 없이 혼자 걷고 있었는데 경계를 하면 했지 인사를 받아주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게 인사를 했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걸어왔다. 나는 가려던 길을 멈추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 사람을 봤다. 키가 크고 적당한 체격의 남자였다.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표정을 살 필 정도로 나에게 마음의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여행객인가요?"

"아니요, 교환학생이에요."

"그럼 여기서 살고 있나요?"

"네."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내 신상 정보를 얘기하는 것이 불편했지만 눈에 띄게 경계하는 것이 더 의심스러울 것이고 딱히 유난을 떨고 싶지는 않았다. 딱 트인 공원이었고 주변에 사람도 많았다.

"어디 가는 길이에요?"

"분수를 찾고 있었어요."

"내가 알려줄게요, 같이 가요."


그 남자와 같이 있던 친구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그 남자와 나만 나란히 분수를 찾으러 떠났다. 그 남자는 자신도 학생이며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전공은 무엇인지 술술 얘기했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는 이 근처라 공원에 자주 온다고 말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내가 다니는 학교는 여기서 좀 멀리 있다고 말해줬다.

"학교 다니는 거면 스페인어 할 줄 알아요?"

"Un poquito." (스페인어로 약간)

그 남자는 내 대답에 크게 웃었다. 이미 2년 동안 바르셀로나에서 학교를 다녀 유창한 스페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에게 내 대답은 어설퍼 보였을 것이다. 너무 깊지 않은 얘기를 나누며 분수가 있는 광장에 도착했다.

"여기에요."

사실 나는 분수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계단 위 끝까지 올라가 보고 싶었지만 포기했다. 내가 아무리 연애를 몰라도 고맙다며 쿨하게 악수를 하고는 냉큼 계단을 오를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그냥 느낌이 좋아서 친구가 되고 싶었어요. 부담 갖지는 말아요, 그냥 친구니까."

'친구'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것이 더 부담스러웠지만 태어나서 이런 상황에 있어 보는 것이 처음이어서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내가 주저하는 것이 보이자 계속해서 그 남자는 부담 갖지 말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연락처를 물어봤는데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연락처가 없었다. 학기 초에 유심칩을 샀었으나 한 달이 지나고 나서 충전하지 않았다. 나는 머리를 굴리다 SNS를 알려줬다. 가지고 있던 내 노트에 이름을 적고는 종이를 찢어 건넸다. 내 이름으로 날 찾을 수 있을까? 확신이 없었지만 못 찾으면 못 찾는 대로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IMG_20141010_152747.jpg 다른 날 가서 찍은 시우타데야의 분수




기숙사에 돌아오는 길에 '마'와 '가'를 만났고, 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줬다. 둘은 신기해하면서도 신났고 나보다 더 난리였다. 괜히 태연한 척하려는 것이 아니라 불안한 마음도 있었고 이른 걱정이 들었다. 산 쿠갓의 카페에서 따듯한 코코아를 마시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트북을 켜 SNS를 들어갔다. 진심으로 그 남자가 친구 요청을 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새로운 알림을 발견했다. 그 남자에게서 친구 요청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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