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마지막 날이 갖는 의미
로마에 오면 로마 법을 따르는 것처럼 바르셀로나에 오면 바르셀로나의 분위기에 취해야 한다. 일주일 전부터 M은 할로윈 파티에 대해 얘기했다. 친구들과 할로윈 밤에 파티를 갈 거라며 나와 내 친구들도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바로 네타방 친구들에게 물어봤고 거의 모든 여자 멤버들은 제안에 응했다. 10월에 들어섰을 때부터 마트와 가게, 심지어 학교까지 할로윈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곳곳에 호박이 걸려있었고 마녀와 피가 낭자한 가면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할로윈이라고 특별한 계획을 세웠던 것은 그날로부터 딱 1년 전이 처음이었다. 할로윈이 가까워 오면 SNS에는 흥겨운 파티를 광고하는 글이 하나 걸러 등장했고 마트에도 할로윈을 상징하는 물품들이 눈에 띄는 곳에 진열되었다. 그전까지는 할로윈을 영어학원이나 유치원에서 하는 아이들 축제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많이 경험해보라는 엄마의 조언에 따라 할로윈을 '경험'해보기 위해 친구와 이태원으로 갔다. 특별한 코스튬을 입거나 화장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분위기를 즐기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디 가서나 할 수 있는 밥 먹고 술 마시는 것이 전부였지만 우리를 대신해 코스튬과 분장으로 한껏 분위기를 낸 사람들을 구경했다는 것에 의미를 뒀다.
클럽을 가기 전 '마'와 나는 기숙사에서 멀지 않은 Sant Cugat을 갔다. 베야테라역에서 시내 방향의 페로카릴을 타고 2~3 정류장만 가면 있는 곳이다. 기숙사에 있기에는 답답해서 바람을 쐬고 싶은데 시내까지 나가는 것은 부담스러울 때 찾기 딱 적합한 동네다. 산 쿠갓은 사바델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사바델은 시내에 가깝지만 산 쿠갓은 교외스러운 분위기가 풍긴다. 작고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많고 대형 스파 브랜드는 찾아볼 수 없다. 긴 밤을 보내기 위해 체력을 비축해야 했던 우리에게는 산 쿠갓이 최적의 장소였다. 산 쿠갓 또한 할로윈의 분위기에 잔뜩 휩싸여 있었다. 작은 호박 장식을 걸어둔 가게도 있었고 파티 용품을 파는 가게는 아예 입구에서부터 마녀가 노려보고 있었다.
잠깐 가게에 들러 할로윈 용품을 구경했지만 구매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괜히 어설프게 꾸미는 것보다는 평범한 편이 더 나으니까. 할로윈에 들뜬 가게를 지나니 넓은 공터가 나왔다. 공터 너머로는 산 쿠갓 수도원이 있는데 조용하게 여유를 부리고 싶을 때는 그만한 곳이 없다. '마'와 나는 성당을 한 바퀴 돌았다. 그때는 특별히 할 게 없으면 정처 없이 걸으며 시간을 보냈는데 시간이 금이라면 우리는 금괴를 한 무더기 가지고 있는 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10월의 한 낮은 적당히 바람이 불어 산책하기에 적당했고 햇살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우리는 성당을 한 바퀴 돌고 역으로 가는 길에 Druni를 들렀다. 지난번 라발 지구를 가기 전 발랐던 립스틱이 생각나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그날의 추억을 생각하며 다시 발라봤다. 다시 봐도 내게 잘 어울렸다.
저녁 9시쯤, 메이트들은 꾸미기에 한창이었다. 방과 화장실에서는 작은 미용실이 펼쳐졌고 까르르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손님들도 하나둘 도착했다. 가장 먼저 '사'가 왔는데 한껏 들뜬 메이트들에 당황하며 소파에 앉았다. 곧이어 '가'와 '아', '마'가 차례로 도착했다. '마'는 항상 바지만 입었는데 원피스를 입은 모습을 그때 처음 봤다. '아'는 귀여운 악마 머리띠를 챙겨 왔는데 우리 중 가장 할로윈에 적합했다. 네타방의 소녀들이 거실에서 얘기를 나누는 동안 메이트들은 인디언 분장에 열을 올렸다. 인디언 머리띠를 하고 양 볼에 알록달록한 선을 그렸다. 드레스 코드를 블랙으로 맞춘 것을 보고는 생각했다.
'이거, 여느 날에 가는 클럽 느낌이 아니구나.'
누가 봐도 한껏 꾸민 메이트들은 보드카에 고 카페인 음료를 섞어 한 잔씩 돌렸다. 나는 3일 전에 메이트들 손에 들린 보드카를 발견했다. 냉장고에 알코올이 들어간 음료를 넣어두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기에 커다란 보드카 한 병을 봤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 이로써 나와 같은 지붕에 사는 아이들이 할로윈을 얼마나 고대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셋은 술을 잘 마시지 못했는데 그 덕에 금방 취했고 우리는 어린 동생들이 술기운에 들떠있는 모습을 귀여워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유명하다는 클럽은 해변가에 몰려있다. L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간 클럽은 관광객보다는 현지인이 많이 가는 클럽이라고 했다. 우리가 클럽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금세 가득 찼고 일찍 와서 앉을자리를 맡아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내게 메이트들은 공부하는 모습으로 익숙했다. 내가 수업을 갔다 오거나 시내를 나갔다 왔을 때 그들은 밥을 먹는 모습과 공부하는 모습 중 하나를 보여줬다. 그러나 클럽에서의 메이트들은 내가 집에서 보던 그 사람들이 아니었다. 스테이지를 올라가는 것은 기본이고 흥이 오를 대로 올라 음악에 몸을 제대로 맡겼다. 그런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고 재밌었다.
클럽답게 뭔가를 시도해보려는 남자들도 가끔씩 있었으나 누가 봐도 외국인인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마'는 잠깐 바람을 쐬고 싶다고 했고 나도 따라 나갔다. 술에 취해 또는 음악에 취해 허우적대는 사람들을 지나 검은 와이셔츠를 입은 건장한 남자가 서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침착한 남자의 뒤에 바깥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는데 가도 되는 곳인지 몰라 주춤했다.
"옥상으로 올라갈 건가요?"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남자는 매너 있는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바람소리만 들리는 한적한 옥상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마'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고 나는 난간 너머를 내다봤다. 새벽 3시에 가까운 시간, 세상은 어둡고 고요했다. 누군가에게는 흥겨운 할로윈이고, 옛 노래 속에서는 잊혀진 계절의 마지막 날이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삶에 적응했다는 것을 깨달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