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어색함 속에서 가까워지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와 같이 온도도 내려갔다. 혼자서 페로카릴을 타고 시내를 나가본 것은 여럿이지만 긴장한 적은 없었다. 누군가 내 가방을 노리지나 않을까 하는 긴장이 아니라 설레는 마음이 만들어낸 긴장. 비가 내리면 창밖을 구경하기가 어렵다. 창이 잔뜩 머금은 물 때문에 사물을 분간하기가 어려워 늘 지나쳐오며 익숙했던 동네도 다르게 보였다. 한낮이었지만 밖은 밝지 않았고 열차 안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다들 어디를 가고 있는 걸까? 생각하는 대로 보는 법이라고, 일상을 벗어난 행선지를 향하는 나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평일 한낮에 시내를 나가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오랜 시간 알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걸까 아니면 나처럼 낯선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걸까?
A군을 다시 만나기로 했던 날,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내가 A군을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한 번 밖에 보지 않았기에 얼굴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키가 크고 환하게 웃던 느낌만 떠오를 뿐 머리스타일이 어땠는지를 비롯해 어느 노래 가사처럼 눈 색깔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만약 A군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러면 나는 10분 만에 다시 기숙사로 돌아올 수도 있다. 궁금증을 꾹꾹 누르고 있던 네타방 친구들에게 멋들어진 얘기를 들려줄 수 없는 민망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제발 먼저 나를 알아보길.
우리는 시우타데야 공원 입구에서 만나기로 해서 Arc de Triomf역에서 내렸다. 와 본 적이 있는 곳이지만 긴장한 탓인지 어느 출구로 나가야되는지 헷갈렸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향하는 곳으로 따라갔더니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건너편에 거대한 아치문이 보였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홀로 비를 막아선 우산이 가엾게 느껴질 정도였다.
A군은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비가 오면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이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야 떠올랐다. 혹시 오늘 안 나오고 싶은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휴대전화를 개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와이파이가 잡히는 곳에서만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A군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못 알아보지는 않을까, 나를 못 알아보면 어쩌나 하는 고민 같은 것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느낌이었고 인상이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환한 웃음으로 서있는 A군을 보니 나도 따라 웃음이 나왔다. A군은 어색하지만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잘 지냈냐고 물었다. 우리는 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공원에는 건물이 줄지어 있었다. 용이 그려져있는 휘장이 걸린 붉은 건물, 거대한 온실, 누렇게 바랜 대리석 건물. 각자 우산을 쓰고 걷던 우리는 줄기차게 내리는 비에 질렸던 것인지 아님 서로의 간격을 좁히고 싶었던 건지 비를 피할 건물을 찾았다. 공원 중간쯤에 위치한 대리석 건물 처마에서 잠시 우산을 접고 건물을 등진 채 나란히 섰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땅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세고 있는데 A군 옆으로 어떤 남자가 비를 피해 뛰어 들어왔다. 그 사람은 우리에게 간단히 스페인어로 인사했고, A군에게 몇 마디를 더했다. A군도 스페인어로 대답해서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처음에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를 힐끗 가리키는 그 사람의 눈짓과 멋쩍으면서 난처해하는 A군의 표정으로 미루어보아 내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우리에게 인사한 뒤 신문지로 머리를 가린 채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A군이 나를 보며 말했다.
"Do you understand what he said?"
"No, I don't."
사실 서너 개의 단어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어서 무슨 얘기가 오고 갔는지 눈치챘지만 난감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모른척했다. A군도 내가 못 알아들었길 바라는 눈치였다. 우산 하나를 나눠 쓰는 클리셰가 아니더라도 비는 두 사람을 더 가깝게 만들었다. 커지는 빗소리에 둘은 서로의 말을 듣기 위해 다가갈 수밖에 없었으니까.
점점 커지는 빗소리에도 시간이 지나자 비는 그쳤다. 우리는 우산을 접고 다시 걸었다. 사람들은 비가 그칠 걸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금세 거리를 채웠다. 붐비는 거리는 일행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노력을 부추긴다. 구름이 걷힐수록 둘 사이의 간격은 좁아졌다. 다시 공원의 입구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만 가보겠다고 했다. A군은 당황한 듯 보였지만 붙잡지는 않았다. 우리는 또 보자는 말을 하고 헤어졌다.
나는 '마'를 만나러 람블라로 향했다. 비에 젖은 거리를 걸으며, 람블라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와 보냈던 모든 순간에 긴장했고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날 밥을 먹지도, 커피를 마시지도 않았다. 그저 걷기만 했을 뿐이다. 어딘가로 들어가 둘만의 공간을 갖는다는 것이 어색했다. 하지만 이렇게 해도 괜찮은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람블라는 하나의 길이지만 4개의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엽서 가게 구역이다. El periodico라는 가게가 줄지어있는데 람블라뿐만 아니라 바르셀로나의 모든 관광지를 담은 엽서가 한 데 모여있다. 엽서 구역을 지나면 씨앗 구역으로 들어선다. 씨앗 구역은 말 그래도 식물을 기를 수 있는 씨앗을 파는 가게가 있는 곳이다. 'Moya'라는 이름의 가게인데 간판부터 싱그러운 초록색이었다. 세 번째 구역은 야외 식당 구역이다. 비가 오지 않는 대부분의 날에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즐기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여름이 길고 겨울에도 온도가 많이 떨어지지 않는 특성상 바르셀로나에는 야외 카페테리아나 테라스가 많다. 심지어 겨울에도 가운데 듬성듬성 전기난로를 피워 바깥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몸을 데워준다. 그곳에서는 대왕 샹그리아를 팔았는데 얼굴만한 잔에 샹그리아가 담겼다. '마' 람블라를 지날 때마다 언젠가 저 큰 잔에 담긴 샹그리아를 깔끔하게 비우리라 다짐했지만 그 날은 오지 않았다. 생각보다 한 학기는 짧았으니까. 평소라면 밀랍 인형 박물관부터 시작되는 네 번째 구역에서 다양한 분장을 한 행위 예술가를 만날 수 있었겠지만 그 날은 궂은 날씨로 예술가들이 휴식을 취했다.
'마'는 람블라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스타벅스에 있었다. 내가 앞에 털썩 앉자 '마'가 꽤 놀라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 데이트를 하러 간다는 애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눈 앞에 나타났으니까. '마'에게는 절반의 쿨한 척과 절반의 솔직함을 보여줬다. 아직 뭔가를 확실히 말할 단계가 아니었고 내가 서투르고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카탈루냐역에서 기숙사로 돌아가는 열차를 기다렸다. 종점에 서있던 페로카릴은 시간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 출발했다. 빗속에 알아보지 못했던 동네가 선명하게 보였고 모든 것이 다시 익숙했던 예전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