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성의 실체

뚜렷하지 않을 때는 신비롭지만 밝혀진다 해도 여전히 매력적이다

by 사과실

유명한 관광지도 아니고, 그래서 내가 가져간 관광책자에도 나오지 않는 곳이 있었다. 몬주익 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그리고 구엘 공원 꼭대기에서 볼 때마다 항상 궁금했다. 저곳은 어딜까? 거리가 멀어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건물은 웅장한 성처럼 보였고 성은 분홍빛 하늘 속에 자신을 감췄다. 난 그곳이 오래된 성이라 굳게 믿었는데 신데렐라가 간절히 바랐던 무도회가 열리는 성보다는 벨을 만나기 전 외로운 야수가 살던 성을 떠올렸다. 신비로운 성의 실체를 보고 싶으면서도 그 자체로 남기고 싶은 감정이 뒤섞였다.


IMG_20141021_190032.jpg 구엘공원에서 바라 본 외로운 성




그러던 어느 날, 네타방의 친구가 외로운 성의 정체를 알아냈다. 성은 사실 성당이었고 그 옆에는 외로움과는 거리가 먼 놀이공원이 있었다. 신비로움은 깨졌지만 오히려 성이라 믿었던 성당은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매력적인 곳은 친구들과 함께 갈 때 매력이 배가 된다. 친구 중에서도 정말 친한 친구와. 네타방은 당장 행동으로 옮겼고, 처음 Tibidabo를 갔을 때는 어두운 밤이었다. 우리는 페로카릴을 타고 페우 델 푸니쿨라역에서 내려 푸니쿨라를 탔다. 나는 푸니쿨라를 탔을 때 놀이기구를 탈 때만큼 설렜다.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교통수단이었고 깎아내린 절벽을 올라가는 기분이라 스릴이 넘쳤다. 푸니쿨라에서 내려 버스를 기다리는 데 이미 세상은 깜깜했다. 외로운 버스 한 대가 왔고 검은 길을 따라 올라갔다. 티비다보를 오르는 버스는 남산 순환 버스를 떠올리게 했다. 외길을 따라 묵묵히 올라가지만 한쪽으로는 은은한 야경을 펼쳐보이는 모습이 똑같았다. 버스 기사님은 'Adios', 'Adeu', 'Bye'를 번갈아 사용하며 다국적인 면모를 보여주셨다.


밤 중의 산이 으레 그러하듯 티비다보는 어둡고 조용했다. Sagrat Cor 성당만이 환한 빛을 내뿜으며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진정 찬란한 성과 같았다. 우리는 성당으로 들어가서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중 종교가 있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각자의 자리를 잡았다. 이 친구가 어떤 치약을 쓰는지 저 친구가 프라이팬을 언제 샀으며 이제 곧 파스타면을 장만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정도로 숨김없는 사이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각자 다른 행과 열에 앉았다. 그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고 속으로는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서로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공유했지만 때로는 프라이버시를 지켜줘야 할 순간을 알았다.




성당을 나온 우리는 기숙사에서의 모습으로 금세 돌아왔다. 사방팔방 뛰어다니고 자지러지게 웃고 쉴 새 없이 농담을 던졌다. 어두운 티비다보를 우리가 전세 낸 것처럼 자유롭게 그러면서도 소중하게 즐겼다. 문을 닫은 놀이공원 난간에 기대어 보니 저 멀리로는 바다가, 그 앞으로는 바르셀로나 시내가 보였다. 밤이 찾아오면 바다와 하늘은 경계를 잃는다. 도시의 빛마저 없었다면 세상은 태초의 우주와 같겠지. 우리는 싸늘한 밤공기를 견디며 야경을 감상했다. 야경은 신비로운 힘을 가졌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여주고, 때로는 세상이 만만하다며 우리를 속이고, 어쩔 때는 공포로 몰아넣는다. 그날은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말해주는 날이었다.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었고 모든 상황과 공기가 즐거웠다. 셀카봉을 길게 늘어뜨려 사진을 찍으며 어떻게든 아름다운 순간을 최대한 담아보려 애를 썼다.


IMG_20141113_190855.jpg 티비다보의 야경




IMG_20141116_172833.jpg 티비다보의 해질녁


어두운 티비다보가 아쉬워 해가 떠있을 때 다시 찾았다. 그 당시는 늘 그랬다. 해가 중천에 걸려있을 때보다는 저 너머로 질 때쯤이 외출의 욕구를 자극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해는 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온도는 떨어지지 않았고 외출하기에 거뜬했다. 티비다보를 갈 수 있는 방법에는 3가지나 있지만 우리는 처음과 똑같은 방법으로 티비다보를 찾았다. 그때와 변함없는 길을 택했던 우리와는 달리 티비다보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줬다. 활기차고 흥미롭고 시끌벅적한 놀이공원의 전형적인 풍경이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많은 아이들을 본 날이었고 아이들은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놀이기구가 다양하고 격정적이지는 않았으나 고유의 분위기를 풍겼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티비다보의 놀이공원은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유럽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놀이공원이다. 세월과 추억이 깃든 놀이공원은 화려할 필요가 없었다.


IMG_20141116_173615.jpg 티비다보 놀이공원의 비행기




어린 시절에는 가족과,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과 놀이공원을 찾았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남자 친구와 놀이공원을 찾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난 남자 친구와 놀이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다. 꼭 그런 이유 때문에 A군을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이미 A군이 내 생활에 많이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A군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때까지 연애 경험이 전무했다. 남자와 그 정도로 가까운 감정을 나눠 본 적도, 아니 그런 감정 자체를 '공유' 했던 적이 없었다. 때로는 내 쪽에서 다른 때는 상대방 쪽에서 일방적으로 감정을 보냈다. A군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것이 걱정됐던 이유는 내가 그 관심을 받아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예 받아 줄 생각이 없었다면 고민도 하지 않고 잘라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버겁더라도 그 관심을 받아주고 싶었고 누리고 싶었다.


나는 조금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뻣뻣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유연하게 그렇지만 조심스럽게 관계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것은 내게 낯설기 때문이리라. 모든 것의 처음은 낯설고 두렵고 어색하다. 바르셀로나의 첫 일주일을 떠올리며 '그것도 견뎌냈는데 이 정도도 못하리!'라고 생각하며 내 삶에서 새로운 목차를 시작했다.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아서 신비롭지만, 열기 시작했을 때 더 매력적인 그 부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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