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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Jun 18. 2021

경력을 잘못 쌓은 것 같습니다

뿌연 안갯속 빨간불에 걸렸다

5년 차 직장인.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라 일을 해왔던 것일 뿐인데 어느덧 반십년의 시간을 직장에서 보낸 경력자가 되었다. 첫 문장을 쓰면서도 '5년 차'라는 단어가 입과 손에 붙지 않아 몇 번을 다시 읽어봤다. 5년이라는 시간이 어색한 이유는 빠르게 흐른 시간이 믿기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직장에 만족을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직장인으로서 보낸 5년의 시간 동안 단 하루도 이직 준비를 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때와는 달리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어디로 이직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적지 않은 나이에 그래도 번듯한 곳, 이름은 좀 들어봤을 만한 곳, 워라벨이 되거나 육아휴직이 있을만한 곳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조건은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 다니는 직장이 나름 전문직 비슷한 거라 다시 일반행정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전문직의 타이틀이라도 붙잡고 있지 않으면 대체품의 늪에 빠져버릴 것 같다. 소모품으로 쓰여도 호랑이처럼 가죽은 남겨야 하는데 나는 남김없이 대체품으로 쓰였다가 버려질 것이다. 내 가치는 무용담으로 길이길이 전해질 호랑이 가죽만도 못한 걸까 봐 억지로 전문직의 끈을 놓지 못한다.




나의 직장생활은 인턴으로 시작되었다. 꽤 괜찮은 공공기관이었는데 전공과 전혀 다른 직무였음에도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3개월의 짧은 인턴을 마친 뒤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할 때가 왔다. 하지만 뉴스에 나오는 취업난은 이제 내 현실이 되었고 내가 원하는 직장을 구하는 것은 어려웠다. 결국 정규직만 찾던 눈을 살짝 돌려 계약직에도 지원했다. 그래, 경력이라도 먼저 쌓자. 그때 내가 바랐던 건 영어를 쓸 수 있는 곳. 즉,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곳이었다. 조건을 딱 하나로 축소하니 드디어 취직이 됐다.


2년의 계약직이 끝나고 지금 직장으로 옮기기 전 4개월의 공백기가 있었다. 두 번째로 구직을 하며 이번에는 반드시 정규직 자리를 얻겠다고 다짐했다. 이번에는 조건이 하나 더 들었다. 영어를 쓸 수 있는 곳과 오래 일할 수 있는 곳. 결국 딱 그 조건에만 부합하는 직장을 얻었다. 무기계약직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유기계약직에서 무기계약직이 됐으니 나름 발전했다고 봐도 되는 걸까? 내가 치열하게 취업 준비를 하지 못한 탓도 있으니 불만을 가질 자격도 없다.


이번 직장의 문제는 대우가 너무 별로라는 것이다. 금전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이직 준비를 하며 생각했다. 처음에 바랐던 조건 하나, 영어를 쓰는 것. 영어를 질리게 쓸 수 있는 곳에서 일하게 됐는데 왜 만족을 못하니. 추가된 조건 하나, 오래 일할 수 있는 곳. 회사 돈을 횡령하지만 않으면 정년까지 일할 수 있는데 도대체 왜 관두려고 하는 걸까?




'방랑자들' by 올가 토카르추크, '계속되는 여명 속에서 비행하게 된다'


원론적인 질문을 던졌다. 뭘 하고 싶은 걸까? 뭘 해야 만족할 수 있을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꿈 많던 때로 돌아가 봤다. 계약직으로 눈을 돌리면서 조건을 축소하기 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싶었던가, 지금의 나와 무엇이 달랐는가. 내가 선택되는 입장이 아니라 선택하는 입장이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지 상상으로 진로를 플렉스 했다. 그랬더니 무엇이 꼬였는지 선명해졌다.


내가 둔 덫에 내가 걸려버렸다. 경력을 발전시켰어야 했는데 방향을 잡았어야 했는데 제자리에서 시간만 채운 것을 경력이라 불렀던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나니 경력을 쌓는 것이 두려워졌다. 하지만 제자리에서 시간이 흐르는 것을 보는 것은 살인적이다.


다시 돌아갈 용기를 내야 한다는 걸 머리보다 가슴이 알고 있다. 지금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아니, 그것보다도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을까? 20대 초반에 했어야 할 고민을 30대 초반에 하고 있다. 아니, 30대 초반이 되니까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꿈 많은 시절에는 짐작하지 못했던 미래가 현실이 된 30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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