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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Oct 27. 2024

한국어 교사도 돈은 벌어야죠.

많이 벌면 더 좋고요.

나는 한때 한국어 교사로서, 한국어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댓가를 받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었다. 경험이 없었기에, 그저 내가 모국어로 말만 하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욕심부리지 말고 그 정도면 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도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결국 그 말에 적응해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니 돈을 이야기하는 것이 마치 욕심부리는 것 같다는 말에 암묵적으로 동의해버린 셈이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한국어 교사’도 당연히 돈을 벌어야 하지 않나? 너무 당연한 말 같지만, 막상 이 말을 꺼내는 게 조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 이 글이, 아마 처음으로 내 속마음을 밖으로 내보이는 순간일 것이다.

교육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순수한 열정만으로도 충분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꽤 많다. 한국은 사교육 시장이 워낙 발달한 나라다. 그래서 한국 내에서의 사교육은 정당하고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한국어’라는 단어가 붙고, 한국 밖에서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돈을 이야기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돈이 마치 ‘볼드모트’처럼 금기시되어, 언급하는 순간 불편함이 감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한국어 교사, 그러니까 돈을 벌고 싶어 하는 한국어 교사와 그들을 지원하려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거룩하지 않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거룩함에서 빗겨간 돈의 멱살을 잡고 우리 앞에 세워 물어보자. 내가 너, 돈 없이 살 수 있을까?



교육자의 내 시간을 존중받는 것은 당연하다


내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다. 교사로서 학생들과 함께 성장하며 그들의 배움을 돕는 것이 이 일의 본질이다. 돈은 부수적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배움과 그 과정에서 교사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교육은 신성하다. 그렇다. 신성한 교육이라는 영역에는 그에 걸맞은 좋은 선생님들이 많아야 한다. 여기서 ‘좋은 교사’란 단순히 지식만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들과 진심으로 소통하고 그들의 성장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진정성 있는 교사들이 많으면 좋겠다. 그들이 곧 내 동료가 되니까. 헬렌 켈러 같은 선생님들이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면, 나는 얼마나 더 대단한 인물이 되어 이 삶을 후회 없이 즐기고, 내 인생을 실험 삼아 후련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을까?


교육자가 되어 보면, 그리고 내가 교육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더 잘 알게 된다. 교육자는 봉사자로만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조금 다른 얘기일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교육자다. 선생님이 없더라도, 결국 우리는 자신을 길러나가게 된다. 받은 교육을 발판 삼아, 나 스스로 나를 키워 나가는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 걸어가는 길이니, 언젠가는 독립해서 자신이 자신의 헬렌 켈러가 되는 순간이 온다. 결국, 나를 기르는 교육자가 되는 거다.


때때로 교육자에게 거룩함을 덧씌우며, 돈을 바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날선 눈빛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아이고, 그 눈빛 좀 거둬주시죠.’라고 말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사명감은 필요하나 사명감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현실을 외면한 채 사명감만으로만 일을 하다 보면, 교사도 지치고 결국 자신이 하던 일에 대한 열정까지 잃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곳은 하늘나라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이기 때문이다. 두 발은 땅에 딛고, 눈은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나도, 나의 주변인들도 그게 더 편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어떤 직업이든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걸 위해 일을 하는 것이다. 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든, 국내에서 국어를 가르치든, 영어를 가르치든, 어떤 수업이든 마찬가지다.



말이 좋아 사명감, 제 값은 치뤄주셔야죠. 

제가 설정한 ‘제 값’이요.


교육은 나의 직업이고, 내가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쏟는 만큼 보상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학생들로부터 배웠다.


오래된 학생들에게는 처음 수업을 시작할 때의 가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학생을 유지하려는 마음 때문이라기보다는, 지금 내가 더 높은 수업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그때 있어줬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고마운 사람들이다. 과거에 그들이 나에게 선뜻 손을 내밀어 주었기에 내가 교육자로서 전념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지금도 같은 가격을 받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자주, 사실 아주 자주 나는 수업료 계산을 깜빡하기도 한다. 학생들이 수업료를 냈는지, 수업 예약을 했는지조차 확인하지 않고 넘어가는 때가 많다. ‘어련히 돈이 들어오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과 믿음, 그리고 나의 허술함과 허당스러움이 만들어낸 결과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학생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네가 수업료를 올렸다는 걸 알고 있어. 네가 1년 반 동안 수업료를 유지해 준 것도 알고 있어. 네가 말하지 않아서 내가 먼저 말하는데, 나도 이제 새로운 수업료로 계산할게. 너는 그럴 자격이 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 tu le mérites.)


여기서 눈물이 한 스푼 고였지만, 이어지는 말에서 그 눈물은 쏙 들어갔다.


“그런데 선생님, 우리 수업료 계산 안 했어. 넌 나를 믿어서 그러는 거 알아. 그래도 항상 정확하게 계산해줘. 그래야 나도 마음이 편해.” (참고로 이건 프랑스어를 한국어로 내가 옮긴 것이고 프랑스어로 대화할 때 우리는 반말을 한다.)


내가 ’어차피 수업을 무료로 해주면 더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학생은 자신이 받는 서비스에 대한 노동력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자 했다. 그 학생의 마음은, 내가 강제된 ‘거룩함’을 벗겨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내 노동력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고, 이제는 돈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부끄럽거나 민망해하지 않게 되었다. 여전히 어렵긴 하지만, 이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결론적으로 나와 학생은 긴 대화 끝에 수업료를 조금 인상했지만, 현재의 가격으로 설정하지는 않았다. 내가 열심히 네고를 했기에, 서로 한 발씩 물러서 절충점에서 악수를 하며 마무리.


누군가 나에게 시간을 내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녹아든 인생 한 조각이 내게 건너오는 것이다. 그렇게 타인의 역사와 시간을 받아들이는 일에는 최소한의 존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니만큼,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는 것은 이후 더 나은 가르침과 배움을 가능하게 한다. 사명감만으로는 좋은 교사가 될 수 없다. 교사의 삶이 안정되어야만,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전업 ? 부업 ? 중요한 건 앞 글자가 아닌 뒷 글자. ‘업’


자, 나는 한국어 교사다. 그리고 그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돈만을 목적으로 교육, 특히 한국어 교육을 바라보는 건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은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그 일을 잘해내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다. 돈은 그저 부수적인 가치 중 하나일 뿐, 목적은 아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적절한 보상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 내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한국어 교사를 부업으로 삼으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본업으로 삼는 나 같은 사람은? 나는 외국에 살고 있고, 이곳에서의 생존비가 만만치 않다. 그렇다면, 전업으로 이 일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높은 수업료를 받아도 되고, 부업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이럴 때면 스스로 ‘내로남불’ 같은 이중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나 역시 아직 배우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교사는 누구나 할 수 있지 않나요? 말만 하면 되잖아요. 좋은 부업이에요.’라는 말을 들을 때면 당장 문을 걸어 잠그고 이 분야에 쉽게 뛰어드는 것을 막고 싶은 충동이 든다. 말만 하면 된다고? 말만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 바로 교육이다. 외국인들, 영어 원어민이나 프랑스어 원어민들이 모두 교사인가? 그들과 대화한다고 해서 그 언어를 저절로 마스터한 적이 있나?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언어 실력을 타고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언어를 가르치는 것은 단순히 말만 하는 일이 아니다. 교육자는 그 말 뒤에 지식과 책임이 있다. 그렇기에 ‘부업 삼아’ 한국어 교육 시장에 뛰어드는 게 나쁘지는 않지만, 그 가벼운 접근이 언젠가 그 교육자 스스로의 발목을 잡지 않을까 우려된다. 물론, 한국어를 가르치는 데 특별한 자격증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교원 자격증이 있으면 정식 기관에서 수업을 할 수 있겠지만, 없어도 요즘은 온라인 플랫폼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게 함정이다. 누구나 할 수 있다 보니, 결국 아무도 제대로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자책감은 ’누구나 하는데 나만 못하나?’라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어설픈 언어 교육은 학습자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있다. 마치 갓난아기를 위험한 곳에 내버려두고, 자신은 안전한 방 안에서 쉬는 것과 같다. 이 일에는, 특히나 교육자라는 직업에는 분명한 ‘책임감’이 따른다.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한국어 교사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선배와 후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면서 계속해서 ‘돈’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손가락들이 불편해 죽겠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쓰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내가 돈에 대해 느끼는 이유 모를 거부감을 극복하고 싶어서다. 둘째, 내가 몸담고 있는 곳에서 돈과 얽힌 애매한 눈치 게임을 끝내고 싶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쉼 없이 글을 쓰면서 한편으로는 할 말을 했다는 후련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아는 것은 빙산의 일부일 뿐이고, 나머지 거대한 면을 이미 겪어온 선배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나 역시 부족하고, 깨지면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 그래서 그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내가 이 일을 하고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이전 세대의 교사들 덕분이다. 그들이 닦아놓은 한국어 교육의 토대 위에 내가 서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간 이들의 헌신과 사명감을 받들어 이 분야에 누를 끼치지 않고, 학생과 나 자신에 대한 존중을 통해 내 몫을 다하고 싶다. 그러려면 나는 이 안에서 계속 돈을 벌면서도, 어떤 말을 듣든 그것이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동의하든 반대하든 상관없이 듣고 내 안에서 소화시키며 내 갈 길을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 길을 걷고 싶다고 한다면, 그 길을 비켜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먼저 가본 길에 누군가 준비 없이 간다면, “저기 바위가 있다.” 혹은 “단단한 하이킹화를 신으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내 목표다. 그렇게 길을 걷고 걷다가 오지랖 넓게 여기저기 첨언을 더하며, 내 체력이 다하면 집으로 돌아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가 번 돈으로 맛있는 제철 과일과 와인, 밥과 고기를 먹는 것. 한국어로, 영어로, 프랑스어로, 독일어로 대화하고, 편히 잠드는 것.


그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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