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익명 어플인 <블라인드>를 종종 사용한다. 주목적은 업무 관련 검색인데, 가끔씩 도저히 안 읽고는 못 배길 글들이 올라오곤 한다. 어디 점장이 결혼한 작자인데 바리스타랑 비밀 연애를 한다더라, 어디 수퍼바이저가 바리스타들한테 온갖 쌍욕과 괴롭힘으로 벌써 4명째 퇴사시키고 있다더라, 플로어에서 고객이 똥 싼 썰 푼다 등등...
그중에서도 유독 지나치기 어려웠던 글이 있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바리스타가 쉬는 시간에 누구랑 통화를 하더니, 갑자기 점장한테 조퇴를 하겠대. 그래서 점장이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자기가 기르던 풍뎅이가 죽었다는 거야. 점장은 극 T이어서 조퇴는 안 된다고 했지. 그래서 이 바리스타가 일하는 내내 멘탈이 나가있더라고. 풍뎅이 때문에 조퇴하겠다는 바리스타, 어떻게 생각해? ]
평소 게시들을 읽기만 하던 내가 댓글까지 달게 된 이유는 풍뎅이나 조퇴와 같은 전반적인 내용과는 무관했다. '점장이 극 T이어서 조퇴가 안 된다고 했다'는 말 때문이었다.
MBTI는 분류를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유행으로 분류할 수 있다. 붕어빵 기계 마냥 사람을 비슷하게 찍어내려는 사회에서, 스스로를 알고 싶어 하는 시대적 욕망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불닭볶음면처럼 유행을 너머 이젠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는 듯했다. 하지만 MBTI는 불닭볶음면이 될 수 없었다. 붕어빵과 여름이 공존할 수 없듯이, 분류와 개인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 '너는 T라서 그래' 같은 말로 타인을 규정짓는 용도로 쓰이게 된 순간부터 MBTI는 이미 존재의의를 상실했다. 붕어빵 기계를 깨부수려 했던 러다이트 운동이 팥 붕어빵 기계, 슈크림 붕어빵 기계, 초코 붕어빵 기계, 마라 붕어빵 기계 등 16가지의 붕어빵 기계를 들어오게 한 셈이다.
T와 F논쟁은 MBTI 부작용 중 가장 대중적이다. 회식 자리에서 점장님께서 진지하게 자신의 오랜 투병 생활을 고백하듯 'T 알레르기'가 있다고 말한 적 있다. 그곳에서 '가장 T 성향이 강한 인간'으로 알려져 있는 게 나였기 때문에, 나를 저격하는 농담이었다.(참고로 T는 스스로를 이성적이라고 여기는 유형을 말한다) 나도 그 자리에서 웃었기 때문에 성공한 농담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재채기를 자주 하는 이유까지 알게 되었다. T인 나에게도 T 알레르기가 있었던 것이다!
자기가 T랍시고 스스로를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 여기며 우쭐대는 인간들을 싫어한다. '쿨병'보다 증세가 심각한 'T병'에 걸린 이들은 마치 타인을 공감하지 않고 배려심 없는 말을 해도 되는 자격을 갖고 있는 것 마냥 행동한다. "배부르니까 기분 좋다." "응 그거 혈당 스파이크야." 이런 식인데 이건 T인 게 아니라 그냥 싸가지가 없는 거다. 더 화가 나는 건 싸가지만 없는 게 아니라 문장 자체도 멍청하기 짝이 없다는 데에 있다. 발화자는 음식물 섭취 후 느껴지는 여러 가지 신체적/정신적 반응을, 사회적 약속이라는 언어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에 기인해 '기분 좋다'는 표현을 썼다. 여기서 마치 '기분 좋다'는 표현은 틀렸고 '혈당 스파이크'가 맞다는 뉘앙스의 대답을 한 건 언어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인간들이 자기가 논리적이라고 믿으며 우쭐대고 있다.
'T발, 너 C야?' 같은 MBTI 농담은 웃어넘길 수 있다. 다만 농담이 아니라 타인을 평가하거나 구분 짓는 데에 MBTI를 들먹이면 웃어넘길 수 없다. "점장은 극 T이어서 조퇴는 안 된다"고 했다는 말은 농담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분명히 말하고 싶다. 점장이 극 T이어서 조퇴는 안 된다고 한 게 아니라, 그건 그냥 그 점장이 그런 사람일 뿐이라고. T인지 F인지는 아무 상관없다고. 그 점장과 같은 T인 나는 조퇴시키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생각을 댓글로 옮겼다.
이 문제는 '풍뎅이 죽은 게 조퇴할 만한 일이냐?' 보다는 근본적으로 '조퇴의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에 있다. 스타벅스에서 바리스타를 채용할 권한은 점장과 지역매니저에게 있다. 매장 파트너들의 스케줄을 편성할 권한은 점장에게 있다. 하루하루의 포지션을 배분할 권한은 시프트 리더에게 있다.
그렇다면 조퇴할 권한은? 모든 직책을 떠나 조퇴를 원하는 당사자에게 있다.
조퇴 사유가 어떠하든 간에, 당사자가 조퇴를 원한다면 조퇴를 승인해야 한다. 조퇴로 인해 발생하는 일들에 대한 책임은 조퇴 당사자가 진다. 만약 '풍뎅이 죽은 게 조퇴할만한 사유는 아니다'고 생각하는 점장이라면, 그 바리스타를 '책임감 부족한 인간'으로 평가하면 된다. 수퍼바이저 진급에서 점장의 평가가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그 바리스타는 진급하기 어려울 것이다. 갑작스러운 조퇴는 업무의 공백을 만든다. 이 공백은 같은 매장 파트너들이 떠안게 된다. 조퇴 사유에 대해 공감을 구하지 못했다면,그들의싸늘한 시선을 받으며 일하게 된다.
실시간으로 댓글들이 계속 올라왔다. 여론은 내 생각과 반대였다. 대부분 그딴 게 무슨 조퇴사유냐며 절대 조퇴시키면 안 된다는 댓글이었다. 조퇴 사유가 조퇴를 결정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판단하는 듯했다. 일각에서는 풍뎅이를 반려동물로 포함할 수 있냐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댓글에도 답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답글들의 내용은 여론과 비슷했다. 비난이 난무했다.
'여기가 학교냐? 조퇴하고 싶다고 조퇴하게?'
'너 몇 살이냐? 여기는 회사다.'
답답했다. 오히려 학교가 아니라 회사니까 조퇴가 가능하다. 학교였으면 조퇴의 권한이 선생님께 있기 때문에, 이 녀석이 진짜 아픈지 땡땡이치려고 부리는 꾀병인지는 선생님께서 판단한다(나 때는 그랬다). 여기는 학교가 아니라 회사다. 조퇴도 자유고 일하다 꼭지가 돌아서 점장에게 쌍욕을 한 뒤 그 자리에서 퇴사를 해도 자유다. 그저 그 모든 책임을 본인이 질 뿐이다. 학교가 아니라 회사기 때문에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 조퇴를 본인이 감당해야 한다.
'조퇴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고? 너 조퇴 자주 하지?'
'너 바리스타지?ㅋㅋ 수퍼바이저나 점장이면 그런 말 못 한다. 수퍼자이저인 척하다가 들통났죠?'
'니가 3명 일하는데 1명 조퇴하는 꼬라지 당해봐. 그딴 말이 나올까?'
어느 순간부터 조롱 답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내 댓글을 삭제했다. <블라인드>의 댓글들이 파트너들의 중론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이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정확히는 조롱에 울화통이 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작은 매장일수록 조퇴는 치명적일 수 있다. 단순하게 가정하여 계산해 봐도 3명 근무하는 시간대에서 1명이 조퇴하면 1인당 업무량은 1.5배가 되기 때문이다. 평소 하던 업무량의 1.5배를 하라고 하면 좋아할 사람이 어딨겠는가. 하지만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건 그 1.5배의 업무량을 지시한 사람, 혹은 그 업무량을 강요받는 환경이다. 조퇴한 파트너가 "저 오늘 조퇴하니, 1.5배 업무 부탁드립니다."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조퇴로 인해 남아있던 파트너가 1.5배의 업무를 해야 했다면 그 업무량을 지시/강요하는 환경을 만든 존재는 회사, 즉 스타벅스라고 봐야 한다.
애초에 한 명이 조퇴했다는 이유로 매장 운영이 힘들어지고 나머지 파트너들의 노동 강도가 한계 이상으로 높아진다면 그 조직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여기서 그 조직은 매장일 수도 있고, 지역(스타벅스는 13~14개 매장을 하나의 지역으로 묶는다)일 수도 있고, 스타벅스 전체일 수도 있다. 조직에 문제가 있다면 조직적인 차원에서의 개선이 필요하다. 조직의 책임이 개인에게 전가되면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떠넘겨진 책임은 파트너들 간의 균열을 일으킨다. 결국 파트너 개인만 상처 입게 된다. 이미 저 블라인드 게시글에서도, 게시자가 '풍뎅이 때문에 조퇴하려 한 바리스타'를 따가운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게시글에 댓글이 수십 개 달리더니 얼마 안 가 글 자체가 삭제되었다. 게시자가 어떤 의도로 삭제했는지는 모르지만 풍뎅이라는 소재 특성상 파트너를 특정할 우려가 있었다. 조퇴를 요구했던 파트너는 그 지역 내 유명 인사가 되었을 확률이 높다. 퇴사하지 않고 지금까지 스타벅스를 잘 다니고 있을 지도 의문이다.
많은 파트너들이 노동 강도가 강해졌을 때 서로 신뢰하며 더 좋은 결과를 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서로의 탓이라 여기며 불신을 초래하기도 한다. 정작 근로자가 힘든 만큼 비용이 절감되어 이윤을 남기는 회사를 탓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회사는 기본적으로 이윤을 추구하기 때문에 높은 노동 강도를 요구하는 입장이 나쁘다고만 볼 수 없다. 하지만 높아진 노동 강도에 대해서 어떤 합리적인 설명 대신, 파트너들이 서로를 탓하게 만드는 풍토는 회사를 위해서나 파트너 개인을 위해서나 결코 좋은 방향이 아니다. 같이 일하는 파트너들이 힘들어진다는 이유로 조퇴를 반대한다는 <블라인드>의 댓글들은, 이미 이 풍토가 어느새 스타벅스에 조금씩 퍼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