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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솔 Oct 13. 2024

예술가의 무덤, 혹은 어중간한 삶의 안식처

"해솔아. 스타벅스는 말이야. 예술가의 무덤이야."

회식자리가 끝나고 점장 루키가 소주 냄새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작곡가가 꿈이었다. 엔리오 모리꼬네 같은 거장은 아니더라도 엔딩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영화음악가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10년 전 음대를 졸업한 그는 숏사이즈 컵만 한 셋방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근무 시간이 길지 않으면서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았는데 그게 스타벅스 바리스타였다.


"내가 만났던 파트너들 중에 나 같은 사람들 많아. 싱어송라이터가 되고 싶었던 애도 있고,  바이올린 하던 애도 있고, 댄서가 되고 싶었던 애도 있고, 웹툰작가가 되고 싶었던 애도 있고... 너도 글 쓴다 하지 않았나? 근데 걔네들 지금 보면 하나 같이 어디 점장, 어디 부점장, 어디 수퍼바이저 돼있더라. 아님 퇴사해서 지 카페 차렸던가."


"하고 싶은 거로 돈 버는 게 어디 쉽겠어요. 근데 그 사람들이 포기했는지는 어떻게 알아요. 100세 시대인데."


"그래. 다들 마음 한편엔 그 불씨가 남아있을 수도 있겠지. 근데 말이야. 나는 모르겠다. 이 스타벅스라는 곳이... 좋으면서도 미워. 여기서 일하는 게 재밌고, 벌이가 크진 않지만 적어도 내 노력만큼은 받는 것 같고... 유명한 프랜차이즈 카페인데도 월급 밀리는 데가 있다니까? 복지도 좋고 뭐도 좋고 아무튼 여러모로 여기가 좋은 회사인 건 맞아. 근데... 진짜 좋은데... 다시 여기 입사하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안 할 것 같아."


"왜요?"


"돈이 필요했다면 차라리 편의점 알바나 노가다 이런 걸 했을 것 같아. 그 일이 뭐 나쁘다거나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내가 하는 일에 정이 안 붙었으면, 내가 하려 했던 음악도 뭔가 더 열심히 했을 것 같거든. 구차한 명이지. 나는 스타벅스가 좋아. 좋은데, 어중간하게 좋아서 후회된달까... 어중간하게 좋아하는 일을 이렇게 10년 넘게 하다 보니까... 내 인생 자체가 어중간하다는 느낌이 들더라. 앞으로도 이렇게, 또 어중간하게 흘러가겠지. 좋은데, 엄청 좋진 않고. 즐거운데, 엄청 즐겁진 않고. 행복한데, 엄청 행복하진 않은..."


밤이 깊어지 루키의 턱은 거뭇거뭇해졌지만, 수분이 가득해진 그의 눈동자엔 밤거리의 네온사인이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나는 이 나이 든 소년의 마음을 움켜잡는 말을 기어코 내뱉고야 말았다.


"그러면 루키는 음악 할 때... 작곡할 때는 행복했어요?"




스타벅스엔 비정규직이 없다. 바리스타로 입사하면 시급으로 수당을 받고 근무시간 자체도 그리 길지 않지만(바리스타는 보통 하루에 5~7시간 근무한다) 엄연한 정규직이다. 그래서인지 스타벅스엔 잠깐 다니고 그만 둘 생각으로, 아르바이트 삼아 오는 입사자가 동종업계 중엔 적은 편이다. 신입 교육에 많은 인건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점장님들도 단기 근무가 예상되는 지원자들은 웬만하면 뽑지 않는다.


그렇다고 스타벅스에 큰 뜻을 품고 오는 사람도 많지는 않다. 취직에 있어 '큰 뜻'을 운운하는 게 고리타분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취업을 위해 학위를 수여받고 자격증과 스펙을 쌓으며 온갖 시험을 치른다. 스타벅스가 그런 선망받는 직업/회사들에 비해서 허들이 낮은 건 사실이다. 그래서 스타벅스를 일종의 징검다리 삼으려는 입사지원자도 많다. 그들은 카페라는 공간에 대한 애정, 스타벅스가 가진 이미지에 대한 호감을 (돈이라는 가장 중요한 동기를 제외하면) 입사동기로 많이 뽑는다. 이왕 일을 해야 되니,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가는 곳 혹은 이미지가 괜찮은 곳에서 일하고 싶기 때문이다.


스타벅스는 서비스업계에서 묘한 위치에 서있다. 잠시 돈을 벌기 위해 다닌다고 하면 "괜찮네"라는 말을 듣지만, 오래 일해보려 한다고 하면 "알바로 쭉 먹고살 수 있겠어?"라는 말을 듣는다. 이는 스타벅스뿐 아니라 서비스업종 자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드러낸다. 독박육아를 겪어보지 않은 이들이 돌봄 노동의 가치를 알기 어렵고, 감정노동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서비스업 종사자가 겪는 스트레스를 알기 어렵다. 과소평가된 이 두 형태의 노동은, 타인의 평가뿐 아니라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 


루키의 말대로 스타벅스엔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예술이라 불리는 방면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하고 싶은 게 뚜렷했던 사람들이 많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파트너가 된 그들은 파트너로서의 삶에 점점 물들어간다. 이곳에서 느끼는 소속감과 파트너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연대감이, 자갈밭에 물 차오르듯 자존감 사이사이 틈새를 채워나간다. 꼭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더라도, 또 다른 행복의 길이 존재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그들이 품고 있던 뜨거웠던 무언가가, 스타벅스에서 차갑게 식어간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한 곳에서 따뜻해졌다면 한 곳에선 차가워질 수밖에 없다.


어중간하다는 말은 중위를 뜻한다. 상위를 요구하는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결여를 의미한다. 능력주의 사회일수록 어중간한 삶으로부터의 회피가 요구되지만, 정작 삶은 자신이 진정으로 어중간한 사람이라는 깨닫게 되는 여정이다. 유아기엔 세계가 자신을 중심으로 작동한다고 여긴다. 청소년기에 부풀어 오른 꿈은 (못난 어른들이 누르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준다. 해가 지날수록 그 믿음에 점차 금이 가기 시작한다. 나이가 들면서 깨닫는다. 생각보다 내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게 적다는 것을. 삶은 생각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 있다.


또한 나이가 들면서 깨닫는다. 행복이 생각보다 작은 일상들로부터 온다는 것을. 새 책의 잉크와 펄프가 기분 좋게 섞인 냄새를 맡을 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휘저으며 얼음끼리 달그락 부딪히는 소리를 들을 때, 출근길에 지하철과 버스 시간이 딱딱 맞아떨어져 20분 일찍 도착한 덕에 잠깐 책을 펼칠 수 있을 때, 나는 행복을 느낀다. 높은 곳에 있는 욕심과 낮은 곳에 있는 행복을 구분하게 된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오롯한 행복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삶은 생각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생각보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삶. 그 중간쯤 되는 곳, 어중간한 곳에 우리의 삶이 있다. 자신이 그곳에 발을 디디고 있음을 인지할 때 비로소 신발을 벗고 편하게 앉을 수 있다. 스타벅스는 예술가의 무덤이지만, 동시에 어중간한 삶의 안식처다.




몇 년 안 되어 루키는 더 이상 앞치마를 두르지 않게 되었다. 지역매니저라는 윗직급으로 승진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너는 이런 조직 생활엔 안 맞는 것 같다'고 한 적 있다. 생각하는 방식이나 일 할 때의 초점이 조직 차원보다는 혼자 혹은 소수로 일하는 데에 더 적합할 것 같다고 했다(일 못 한다고 돌려 말한 건 아니길). 그의 말에 동의한다. 내가 속한 조직의 발전을 꾀하기보다는 이렇게 뒤에서 음흉하게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나는 내 어중간한 위치조차도 아직 못 찾은 것 같다. 언제쯤 내 위치를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찾을 수는 있을까. 어중간한 위치를 찾지 못한다면, 과연 스타벅스가 나에게도 안식처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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