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하는 매장의 가까운 곳엔 음반을 판매하는 대형 서점이 있다. 평소에는 서점에서 책을 구매해 들리는 손님이 많지만, 음반을 구매해서 들리는 손님도 제법 있다. NCT 같은 보이그룹의 앨범 발매일이 되면 매출에 유의미한 영향이 끼칠 정도로 음반 구매 손님이 몰리기도 한다.
이 손님들은 사실 내가 내드리는 음료에는 관심이 없다. 삼삼오오 모여서 앨범을 개봉할 수 있는 편한 자리가 필요할 뿐이다. 대개는 프라푸치노를 시키고, 앨범 개봉에 열중이셔서 주문번호를 불러도 거의 한 번에 오지 않는다. 매장에 좌석이 많은 편은 아니라 이런 날엔 금방 만석이 된다. 나중에 온 손님에겐 자리가 없음을 안내해야 된다. 자리를 못 잡은 앨범 손님들은 대부분 건물 근처의 계단(쉼터처럼 넓게 형성되어 있다)에 앉아서 앨범을 개봉한다. 이 계단은 실시간으로 포토카드가 교환되는 직거래장터가 된다.
성공적으로 매장 테이블을 잡은 손님들은 도란도란 모여 앉아, 앨범에서 나온 포토카드들을 하나같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앨범 발매일까지 몇 날 며칠 기다리고 판매 시각까지 정확히 맞춰서 줄을 설 정도니, 그 원하던 걸 직접 손끝으로 느낄 때 얼마나 기쁠까. 무언가를 순수한 마음으로 이렇게 좋아한다는 건 좋은 일이다. 덕질만큼 무해하며 누구나 행복할 수 있는 취미가 있을까.
학교가 삶에 필요한 태도를 가르쳐주는 곳이라면, 덕질하는 법도 학교에서 가르쳐야 된다. 사랑이 취미라니, 진정한 낭만이다. 초등학생 때 방학 숙제로 "신나게 놀다 오기"를 내주셨던 담임 선생님이 떠오른다. 노는 건 하다 보면 지친다. 하지만 덕질은 영원하다. 신화창조부터 시작해 현 엔씨티즌으로 겸덕인 모 파트너에 따르면, 최애는 바뀌는 게 아니라 쌓이는 법이라고 한다. '가장 사랑한다'는 의미의 최애는 이 세계에서는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이다.
좋아하는 아이돌 굿즈를 바라보는 저 눈빛들. 오픈런으로 명품을 쟁취한 리셀러들과는 분명 다른 눈빛이다. 나도 그 빛나는 눈빛을 지녔던 때가 있었다. 무언가를 그토록 좋아했던 때가 있었다. 매일 만화책 대여점에 들려 책가방을 두둑하게 채워 다녔다. MP3엔 록밴드 MUSE의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노래가 가득했다(지금도 그 노래들의 가사를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라면 가사를 한 번쯤은 찾아본다는 사실을 서른 넘어 알게 되었다). 게임 워크래프트에 푹 빠졌을 땐 지금까지도 날 시달리게 하는 편두통조차 잊을 수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아픈 것도 잊을 정도였다.
지금은 그런 시간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 책을 읽으며 농땡이 피우는 시간과는 다르다. 혼자 흠뻑 빠져 내일에 대한 걱정도 잊고 무아지경에 이르는, 그런 시간이 없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일수록 어는점이 낮아져 냉동실에서도 얼지 않는 것처럼, '내일에 대한 걱정' 수치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무언가에 흠뻑 빠지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게임을 하려 해도 맘 편히 빠져서 할 수 없다. 만화책을 쌓아두고 읽기보다는 속세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만한 책을 읽게 된다. 또래들보다 뒤처지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게 덕질할 수 없는 비루한 몸이 되어버린 처지를 한동안 한탄했다.
"해솔. 저도 책을 좀 읽어보려 하는데, 추천해 줄 만한 책 있어요?"
그녀는 스트레이 키즈를 좋아한다고 했던 파트너 메이였다. 이런 류의 질문은 늘 즐겁다. 그들이 책을 실제로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책에 대해서 떠들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추천해 줄 때 내 레퍼토리는 거의 정해져 있다. 상대방이 책을 평소에 읽지 않는다면, 김승섭 교수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권한다. 상대방이 책을 평소에 많이 읽는데 김승섭 교수님 책을 읽어본 적 없다면,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권한다. 어렵지 않은 단어로 날카롭게 사회 이면을 진단하는 책이다. 무엇보다 내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친, 애정하는 책이었다.
"이 책은 김승섭 교수님이라는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이 쓰신 책인데, 이 분이 사회역학이라는 분야를 연구하시거든요. 사회역학이 뭐냐면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고, 이 부조리한 사회적 원인을... (중략)... 그래서 책은 보통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고 차별받는 사람들이 어떤 아픔을 겪고... (중략)... 그래서 이 책을 꼭 읽어보셨으면 해요."
"오... 저 그런 내용 한번 읽어보고 싶었어요."
"메이가 진짜 읽을 거면 제가 한 권 사줄게요."
"네? 진짜요?"
"아예 안 사는 것보단 낫죠. 한 권 사면 교수님한테 인세가 들어가니까 전 그것만으로도 좋아요. 그분이 어떤 분이냐면, 항상 약자의 편에 서서 연구하시고... (중략)... 대중교양서도 <아픔이 길이 되려면> 포함해서 몇 권 출간하셨는데, 지금은 힘없는 사람들이 법적 공방에 힘이 될 수 있는 논문에 집중을... (중략)..."
"해솔 그 교수님 되게 좋아하시나 봐요."
"네. 정말요. 그분이 쓴 책, 참여한 책, 번역한 책 다 갖고 있어요. 교수님 강연 당첨돼서 실제로 뵙고 싸인도 받았어요. 그때 제가 편지도 써서 드렸다니까요?."
"진짜요? 성덕이네요. 실제로 만나서 편지도 드리고. 부러워요. 저는 스키즈 덕질 하면서 아직 한 번도 못 만나봤는데."
"어..."
그렇다. 나는 성덕이었다. 덕질할 수 없는 신세라고 한탄했는데. 빨간 약을 먹은 네오처럼 과거를 돌이킬 수 없는 비련의 주인공인 양 행세했는데. 보건대학 교수님 덕질은 덕질이 아니었는가. 세상엔 사람 수만큼의 다양한 덕질이 존재한다. 그 대상이 아이돌일 수도 있고, 배우일 수도 있다. 작가일 수도 있고 교수일 수도 있다. 산 자일수도 있고 죽은 자일수도 있다. '벨에포크' 같은 무형의 관념일 수도 있고 '퓨리오사' 같은 허구의 인물일 수도 있다. '떡볶이' 같은 음식을 수도 있고, '애플' 같은 브랜드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몰랐을 뿐이다. 그저 입덕부정기였다는 것을. 덕질할 수 없는 비루한 몸 따윈 애초에 따분한 피해의식에서 나온 망상이었다는 것을. "사랑은 풍덩 빠지는 것인 줄만 알았지 서서히 물들어 가는 것인 줄은 몰랐"(미술관 옆 동물원 中)다는 것을.
최애가 여전히 쌓여가고 있었다는 것을.
* 놀랍게도 김승섭 교수님께서는 저와 같은 브런치 작가이시기도 합니다. 대중교양서를 한동안은 쓰지 않으실 예정이라고 밝히신 바 있는데요. 브런치에는 가끔씩 글을 올려주셔서 기쁘고 감사합니다. 덕후는 계를 못 탄다는 말도 있는데, 저는 운이 참 좋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나의 최애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