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움직이기조차 힘들 정도로 아픈 날이었다. 증상은 고열로 인한 몸살이었다. 주말이어서 병원을 가지 못해 타이레놀에 의존하고 있었다.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지기를 바라며 애써 눈을 감고 시간을 보냈다. 두어 시간쯤 지나 눈을 떴다. 잠조차 들 수 없는 수준의 고통에 이르렀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결국 애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애인은 한 시간 거리를 단번에 와주었다. 우리는 응급실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대학병원까지는 지하철 역 1개 거리로 가까웠지만,집 바로 앞의 거리는택시가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 아니었다. 어플로 택시를 불러봤지만 몇 분째 잡히지 않았다.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수 없었다. 서있기 조차 힘든 고통에도 우리는 차가 돌아다니는 도로변으로 향했다. 여전히 택시는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산책 삼아 갔다 왔을 거리인데도 병원까지 도저히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 병원 방향 반대편 도로에 서는 택시 한 대를 발견했다. 애인의 부축울 받아 횡단보도를 한걸음 한걸음 겨우 걸었다. 다행히도 택시엔 '빈 차' 표시가 들어와 있었다. 택시기사님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해주었다. 우리는 뒷좌석에 앉았고, 애인이 기사님과 말을 주고받았다.
"OO병원 응급실 부탁드려요."
"OO병원이요? 거기 갈 거면 반대편에서 타야죠."
"아... 택시가 워낙 안 잡혀서 여기로 왔어요."
"아유. 그러면 유턴해야 되잖아요."
"지금 환자가 있어서요...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거기 가려면 유턴해야 되는데..."
"그건 맞는데 여기 환자가 빨리 응급실을 가야 될 것 같아서요... 부탁드릴게요, 기사님."
"반대서 타면 되잖아. 여긴 유턴해야 돼."
"기사님, 그러면 안 된다는 말씀이세요?"
"아니 유턴을 해야 되잖아..."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냐고요. 안 되면 내려서 다른 택시 잡을 테니까 빨리 얘기를 해주세요."
"아니 안 되는 건 아닌데... 유턴해야 되니까 그렇지~"
"기사님. 그래서 안 가시겠다는 거냐고요."
"말했잖아~ 유턴해야 된다고."
택시기사는 아예 팔짱을 끼고 창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택시에서 내렸다. 그는 출발할 생각이 없었다. 유턴해야 되기 때문이었다.
나는 택시가 어떤 시스템으로 운영되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왜 그렇게 유턴을 하기 싫어했는지 알 수는 없다. 짐작할 수 있는 건 우리가 딱히 이득이 되지 않는 고객이었다는 점뿐이다. '이득이 되지 않는' 고객은 택시기사뿐 아니라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그래도 위급한 환자면 돈이 되지 않더라도 데려다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도덕적 잣대를 대고 싶지도 않다. 화가 나는 건 급한 상황임에도 택시기사가 우리에게 내리라고 하지 않고 끝까지 '유턴해야 되는데'라는 말만 반복했다는 점이다. 직접적으로 승차거부를 한 게 아니라, 간접적으로 우리의 하차를 유도했다. 승차거부는 불법이기 때문이다. 직업윤리에 대해서 고민해 본 시점이 이 즈음부터였다.
평생직장이라는 단어가 사라져 가는 시대에서는 직업윤리 또한 흐릿해질 수밖에 없다. 내가 하는 일은 누군가의 생명을 구한다거나, 누군가의 인권을 보호하는 일은 아니다. 귀한 직업과 천한 직업을 나눌 수 없어도, 사회가 돌아가려면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직업은 있다. 스타벅스 파트너가 그런 직업은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은 고객에게 제법 괜찮은 음료를 제공하고, 그들이 편하게 쉴 수 있게 테이블을 닦는 일이다. 그렇다면 파트너에게는 어떤 직업윤리가 있을까. 소비기한이 지난 우유를 쓰지 않고, 요거트를 상온에 두어 잔뜩 발효시키지 않는 것? 그건 윤리가 아니라 법의 문제다. 직업윤리는 윤리의 하위항목이다.
윤리에 관해서는 동서양에서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문장이 하나씩 있는데, 놀랍게도 이 두 문장은 매우 유사하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대접하라." 누가복음 6장의 문장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 논어 위령공편의 문장이다. 결국 직업윤리는 내가 '최소한 이 정도만큼은 받고 싶다'를 기준으로 삼게 되는 게 아닐까. 스테이크 하우스를 방문했다면 (실수가 아니라면) 최소한 안심을 시켰을 때 부챗살이 나오는 일은 없어야 되며, 미디움을 시켰을 땐 최소한 웰던으로 나오는 일은 없어야 된다.
예수와 공자의 말씀만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나에게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일하는 두 가지 말씀이 있다. 첫 번째 말씀이다. "말차 프라푸치노는 6300원입니다. 결코 싼 가격이 아니죠." 성수 쪽에 새로운 매장을 오픈할 때 처음부터 함께 했던 점장님의 말씀이다. 6300원이라고 하면 그 가격에 기대되는 퀄리티라는 게 있다. 싼 건 대충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음료 레시피를 바꿀 수는 없지만, 적어도 대충 만들지 않을 수는 있다. 누군가에게는 가볍게 한 잔 즐길 만한 액수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기분 내고 싶어 크게 마음먹고 쓰는 액수일 수 있다. 나는 항상 고객을 후자로 염두에 둔다. 그렇게 드린 음료는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든다.
두 번째 말씀이다. "이렇게 고객님들이 알아서 와주는 게 얼마나 좋은 건데요." 다른 카페에서 스타벅스로 이직한 바리스타의 말씀이다. 그는 과거에 일했던 곳에서 손님이 오지 않아 아무것도 못 할 때가 제일 힘들었다고 한다. 스타벅스엔 고객이 많다. 뉴스를 보면 요즘 사람들이 스타벅스를 가네 안 가네, 경제 상황이 안 좋으면 커피 값을 먼저 줄이네 안 줄이네 하지만 점심시간 피크 타임을 한번 치르고 나면 도대체 어느 나라 기사인지 궁금해진다. 고객이 알아서 와준다는 건 스타벅스가 이미 고객과 맺은 암묵적인 약속이 있다는 뜻이다.
우연히도 파트너로서의 근무 대부분은 오피스 상권에서 이루어졌다. 지금 있는 곳도 그렇다. 직장인의 출근 시간대인 8시~10시와, 그들이 점심을 먹고 오후 근무를 하기 전에 들리는 12시~14시가 가장 바쁘다. 자주 오는 고객님은 아침에도 오고 점심에도 온다. 우리는 그들을 버디BUDDY라고 부른다. 다들 똑같이 사는 거라고는 하지만 수많은 직장인들을 보면 묘한 마음이 든다. 버디 고객들의 직장 생활이 안녕할지 고될지는 알 수 없다. 항상 무표정인 사람도 있고 항상 웃어주는 사람도 있다. 다만 그들이 스타벅스와 맺은 암묵적인 약속은, 이곳에 있을 때 잠시나마 누릴 수 있는 어떤 해방감이지 않을까.
그들이 이곳에서 머무는 시간은 1분이 안 될 때도 있고 1시간이 넘을 때도 있다. 어느 쪽이든 스타벅스가 일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이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눈을 맞추며 건네는 "좋은 하루 되세요" 한마디다. 신입 파트너를 교육할 땐 항상 고객과의 아이컨택을 강조한다. 눈을 맞추고 말하면 똑같은 한마디라도 '수많은 고객에게 하는 말'이 아닌 '나에게 건네는 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 매장이 그들에게 있어서 오전 근무와 오후 근무의 이음새가 아니라, 하나의 오롯한 공간이길 바란다.
스타벅스에서 직업윤리까지 운운하며 일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모두와 똑같은 시급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일 뿐이다. 더군다나 내가 대단히 노력하는 파트너는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잘해보고 싶은 마음을 만드는 원동력이 있다면, 그건 내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데에서 오는 알량한 마음일 것이다. 의사처럼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 아니어도, 내가 하는 일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데엔 원두 한 톨 정도의 기여를 했기를 바라는 마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