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성은 책임감에서 비롯된다
VIP 고객을 대상으로 한 행사를 준비하던 때의 일입니다.
지금까지 일하면서 겪었던 경험 중, 손에 꼽을 만큼 아찔했던 순간이기도 합니다.
당시 저는 VIP 고객님들께 조금은 특별한 브랜드 경험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단순히 쇼핑을 하거나 설명을 듣는 자리가 아니라, 브랜드를 조금 더 편안하게 느끼고, 함께 일하는 직원들과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만들고 체험하는 원데이 클래스 형식의 행사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팝시클 만들기, 브라우니 팝시클 클래스를 선택했습니다.
이날 행사는 매출이나 실적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정말로 중요한 고객님들께 “오늘 하루가 즐거웠다”고 느끼게 해드리는 쉼표 같은 시간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준비 단계부터 유난히 더 신경을 썼습니다.
업체 선정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새로운 업체를 섣불리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사내 직원 대상으로 앙금 플라워 떡 케이크 원데이 클래스를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함께했던 사장님이 떠올랐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함께 일해봤고, 진행도 안정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현장 대응이 굉장히 프로페셔널했던 분이었습니다. 저는 이 VIP 행사만큼은 ‘검증된 파트너’와 함께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그 사장님께 다시 한 번 연락을 드렸습니다.
VIP 행사인 만큼 고객님들이 동행분과 함께 오실 수도 있고, 현장 분위기에 따라 추가로 만들어보고 싶어 하실 수도 있으니 재료는 넉넉하게 준비해달라, 비용은 더 지불하겠다고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행사의 목적도 정확히 공유했습니다.
“원데이 클래스가 처음이신 분들도 많을 수 있습니다. 너무 기술적으로 가지 말고, 체험 자체가 즐거운 시간이 되게 해주세요.”
저는 이 행사가 ‘잘 만든 결과물’을 남기는 자리가 아니라, 기억에 남는 경험을 남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행사 당일이 되었습니다.
고객님들은 차분하게 도착하셨고, 공간은 미리 준비해둔 음악과 케이터링, 브랜드 소개로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직원들의 동선도 정리되어 있었고, 전체 흐름도 제가 머릿속으로 그려왔던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속으로는 ‘지금까지는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원데이 클래스는 의도적으로 행사의 중반부에 배치했습니다. 브랜드 소개가 끝나고,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분위기가 살짝 느슨해질 즈음. 다시 한 번 집중도를 끌어올릴 수 있는 타이밍이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제 곧 선생님이 도착하여 준비를 시작할 때였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순간까지도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 행사가 곧 제게 ‘전문성이란 무엇인가’를 아주 뼈아프게 가르쳐 줄 사건으로 남게 될 거라는 것을요.
고객님들께서는 식사를 편안하게 하고 계셨고, 저는 원데이 클래스를 진행할 공간에서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클래스 시작까지 약 40분 정도가 남아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그때 제 휴대전화로 연락이 한 통 왔습니다. 원데이 클래스를 진행하기로 했던 사장님이었습니다.
“매니저님, 어떡하죠?”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이미 잔뜩 흔들려 있었습니다. 이어진 말은 이러했습니다.
“팝시클 제로인 브라우니 재료를… 사무실에 놓고 왔어요. 지금 행사장으로 오는 길인데 길이 너무 막혀서 다시 돌아가기도 힘들고, 어떡하죠?”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하지만 당황한 기색을 드러낼 수는 없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잘못했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 수 있는지였습니다. 저는 최대한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어디쯤 오고 계신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는 것이 정말 불가능한 상황인지, 혹시 대신 재료를 가져다줄 수 있는 분은 없는지, 만약 재료가 없다면 클래스 진행 자체가 불가능한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재료를 가져올 경우 최소 소요 시간은 얼마인지.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빠르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은 다소 망설이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언니한테 전화는 해볼게요. 근데 제가 오피스텔 비밀번호 같은 건 잘 공개를 안 해서요…”
그 순간, 비밀번호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저는 그 말을 삼켰습니다. 지금은 감정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퀵 서비스를 부르는 방법, 직접 다시 다녀오는 방법 등 가장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물었고, 그때 필요한 최소 시간을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약속된 답은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즉시 내부 스태프들과 상의해 원데이 클래스 순서를 뒤로 미루고, 고객님들께는 일정이 약간 조정되었다는 안내를 드리며 시간을 최대한 벌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약속했던 한 시간이 지나도, 그분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한 시간이 되기 전부터 10분 단위로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지금 어디쯤 오고 계신지, 상황은 해결되고 있는지, 도착 예정 시간은 언제인지.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거의 없었고, 간간이 연결되는 전화에서는 “운전 중이라서요. 최대한 빨리 갈게요.”라는 말뿐이었습니다.
행사는 점점 공중에 떠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저는 초조함을 감추고, 고객님들께 최대한 불편을 드리지 않기 위해 즉석에서 대화를 유도하고, 준비해둔 간식을 추가로 제공하며 그 시간을 채워나갔습니다. 동시에 한 손으로는 계속해서 담당자에게 연락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고객님들도 서서히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이렇게 늦어질 줄 알았으면 굳이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저희는 이 뒤에 일정이 있어서요.”
지방에서 올라오신 고객님들은 귀가 시간을 걱정하며 불만을 토로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였습니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50분이나 더 지난 뒤, 그분이 정리되지 않은 모습으로 수레와 박스들을 들고 행사장에 나타났습니다. 준비가 끝났어야 할 클래스룸은 여전히 비어 있었고, 그분은 들어오자마자 “저 좀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며 급하게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결국 추가로 15분이 더 지나서야, 원데이 클래스는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 순간까지도 저는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다 보니 실수할 수도 있고, 살다 보면 이런 변수가 생길 수도 있다고. 연락이 원활하지 않았던 점, 약속한 시간을 지키지 못한 점에 대한 분노를 꾹 눌러 담고, 이 행사의 분위기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저는 그 선생님을 최대한 응원하며 진행을 이어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이 일이 전문성에 대한 이야기로까지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브라우니 팝시클 만들기 클래스 자체는 제가 우려했던 것과 달리 꽤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원데이 클래스를 많이 경험해보지 못하신 고객님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본다는 사실 자체에 큰 흥미를 느끼셨고, 난이도도 어렵지 않아 “이거 한 번 더 해보고 싶다”라며 욕심을 내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저 역시 고객님들께 “너무 잘 만드신다”, “아이디어가 정말 좋다”, “디자인이 굉장히 창의적이다”라는 말씀을 드리며 분위기를 즐겁게 이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원래 이 클래스에 약속된 시간은 총 1시간 반이었습니다. 이미 시작이 크게 지연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중간중간 설명과 과정을 많이 생략하며 최대한 속도를 내어 진행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된 시간만큼은 채워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클래스가 시작된 지 약 1시간쯤 지났을 무렵, 강사님 쪽에서 갑자기 수업을 급하게 마무리하려는 기색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완성하지 못하신 고객님들도 계셨고, 오히려 더 해보고 싶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셨기 때문에 저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명 1시간 반을 약속했는데, 왜 이 시간을 지키지 않으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여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바로 다음 일정에 다른 클래스가 잡혀 있고, 원래 다음 클래스 시작 시간이 2시이기 때문에 늦어도 3시 반, 아무리 늦어도 4시 전에는 이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아, 이게 바로 책임감의 부재라는 것이구나.
더 어이가 없었던 점은,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상황에 대한 설명이나 사과는 전혀 없이, “그래도 클래스는 재밌었고 고객님들도 좋아하셨잖아요?”라는 태도로 이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마치 결과가 좋았으니 과정에서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한 태도로 느껴졌습니다.
솔직히 저는 클래스가 끝난 이후에 최소한 이런 말을
기대했습니다.
기다리게 한 점에 대해 정말 죄송하다는 말, 이 행사 자체가 자칫하면 완전히 무너질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는 점에 대한 인식, 그리고 가능하다면 본인들이 할 수 있는 선에서의 보상이나 대안 제시까지.
영세한 사업자이시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완벽한 보상을 바랐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책임을 지려는 태도, 그 진심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돌아온 말은 전혀 달랐습니다.
“원래는 색깔을 8가지만 제공하는데, 이번 행사가 중요하다고 하셔서 10가지로 더 준비해 드린 거예요. 이런 것까지 생각하면 저희도 남는 장사는 아니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꾹 눌러두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행사장을 급하게 정리하고 자리를 떠나셔야 했던 고객님들께 죄송한 마음이 컸던 한편, 세 번이나 신뢰하고 함께했던 고객사인 저희에게조차 “이 정도 해줬으면 된 것 아니냐”는 식으로 말하는 태도에서, 이분은 결국 책임이 아니라 매출과 이익만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 이후의 이야기는 더 하지 않겠습니다. 이 업체가 어디인지도, 회사 차원에서 어떤 대응을 했는지도 굳이 밝히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경험을 통해 제가 분명하게 느낀 점은 하나입니다.
이 세상에는 정말 열과 성을 다해 원데이 클래스를 운영하시는 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며 수많은 고객을 맞이하는 영세사업자분들에 대해서는 저 역시 깊은 존경과 공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기치 못한 변수와 해프닝은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고, 그 자체로는 충분히 이해받을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수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책임지려는 태도, 그리고 앞으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최소한의 설명과 진심 어린 사과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전문성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일정과 마진에 잠시 마음이 흐려져, 결국 더 큰 신뢰를 잃는 선택을 하는 일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저는 이 경험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봅니다.
(아 물론 저는 그 이후로.. 팝시클에 트라우마가 생겨 버렸습니다 ㅎㅎ...)
PROJECT KEEPGOING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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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감상평과 의견도 감사히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