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예은 Dec 29. 2023

한때는 그토록 뜨거웠던, 크로플

추천곡: 토이 <뜨거운 안녕>

2018년 여름, 첫 에세이집인 <다카마쓰를 만나라 갑니다>를 준비할 때부터 지난 2023년 9월 <도쿄 근교를 산책합니다>를 냈을 때까지, 저는 늘 무언가를 쓰고 있었어요. 글쓰기는 좋아했지만 작가가 꿈이었던 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브런치 출판 프로젝트를 통해 출간한 <콜센터의 말>을 포함해, 세 권의 책을 낸 사람이 되었네요. 물론, 저와 출판사의 바람만큼 잘 팔리지는 않았지만요.


일본에서의 체류 자격과 생계유지를 위해 직장에 다니는 저는, 그동안 삶의 의미를 출간에서 찾았나 봐요. 소설을 쓰겠다 다짐했지만 아직 꺼낼 이야기가 충분하지 않아 뭉그적거리는 요즘, 다시 사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있거든요.


남은 인생, 엄마로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소설 한 편은 꼭 완성하고 싶지만 콘텐츠 범람의 시대에 큰 의미가 있을까 싶고, 내 집 마련이나 노후 준비는 그때까지 살아 있지 않으면 그만이고, 여행이나 쇼핑, 미식도 이제는 크게 구미가 당기지 않고, 날씨 탓인지 생존을 위한 모든 활동도 그저 피곤하기만 해요.


무언가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무기력증에 빠져 버리는 저는, 확실한 행복을 가진 사람들을 늘 동경해 왔어요. 몇 년 전 제가 골프를 시작했던 것도, 인생에서 확실한 행복을 하나쯤 확보해 두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초반에는 제법 심취해서 레슨과 연습, 라운딩을 꾸준히 다닌 결과 일 년 만에 ‘깨백’이라는 것도 달성했답니다. 건초염으로 본업은커녕, 휴대폰도 들지 못할 지경이 되는 바람에 그만두었지만요.


일이든, 취미든, 혹은 덕질을 포함한 사랑이든, 제가 다시 무언가에 뜨거워질 수 있을까요. 마치… 와플팬에서 버터향을 풍기며 지글지글 구워지는 크로플처럼요.


해외에 살다 보면,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음식에 무심해질 것 같지만, 천만에요. 약속한 듯 국내 지인들의 인스타그램에 똑같은 음료나 디저트가 올라오면, 한국을 방문할 때까지 벼르고 벼르다 먹곤 해요. 크로플도 마찬가지였는데, 도쿄에 사는 한국인 친구들 중에는 아직도 크로플을 맛보지 못한 이들이 많아 방에 놀러 올 때마다 하나씩 구워 주고 있어요.


제 방에 크로플을 먹으러 온 첫 손님은 다이버예요. 겨울에도 휴가를 내어 따뜻한 나라로 떠나 물속에서 며칠을 살다오는 멋진 친구이지요. 지금까지는 다이빙을 하러 가도 모처럼의 해외여행이니 남들이 가는 관광지도 다녔는데, 최근에는 일정 내내 스쿠버다이빙에만 몰두했고 비로소 충족되는 기분을 느꼈다고 해요.


무엇보다 제 마음에 스며든 이야기는 이거였어요. 불치병에 걸린 다이버들이 스스로 바닷속에서 자신의 숨을 거두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 제 친구인 그도 보홀에서 잭피시 때를 만났을 때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 ‘라는 황홀감을 느꼈다는 것.


크로플에 레드 와인을 마시며 그 말을 듣는데, 왠지 알 것도 같은 그 기분을 직접 느껴보고 싶은 간절함에 휩싸였어요. 아니, 어쩌면 느껴야 한다는 소명이었는지도요. 원래 아쿠아리움을 좋아하는데, 바닷속은 천연 수조나 다름없고, 지상에서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은 제법 만났으니, 남은 시간은 해양 풍경을 찾으러 다녀도 좋지 않을까요.


당장이라도 오픈 워터 자격증을 딸 기세로 친구에게 상담했는데, 첫 다이빙인 만큼 즐거운 기억을 가질 수 있도록 내년에 봄이 오면 일본에서 같이 체험하자고 제안해 주더라고요. 그동안 저는 산소통을 맬 수 있는 튼튼한 어깨와 기초체력을 단련해 보려고요(통장 잔고도요). 미뤘던 운전면허도 내년에는 꼭 취득해야겠어요.


매년 새해 목표는 절주와 출간이었는데, 운전면허와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이라니, 왠지 뿌듯하네요. 이것도 그동안 도전했던 수많은 악기나 스포츠처럼, 스쳐 지나가는 취미가 될 수 있지만, 뭐 어때요. 이렇게 하나하나 시도하다 보면, 무언가는 하나 내 곁에 남지 않겠어요? 한국에서는 유행이 지났을지 모르지만, 도쿄의 제 방에서 매주 성실히 구워지고 있는 크로플처럼요.


재료: 냉동 크로와상 생지 60g, 바닐라 아이스크림, 브라운 치즈, 메이플 시럽
도구: 와플 메이커, 치즈 그라인더

1. 냉동 크로와상 생지는 상온에 30분 이상 해동한다.
2. 와플 메이커에서 6분 간 굽는다.
3. 아이스크림과 브라운 치즈를 취향껏 올린다.
4. 마지막으로 메이플 시럽을 뿌려 주면 완성.



그 친구랑 어떻게 친해졌는지만 덧붙일게요. 공통의 지인과 늦게까지 즐거운 술자리를 가진 다음 날, ‘마지막쯤 기억이 없는데 혹시 실수한 건 없나요?’라는 그의 메시지를 보고, 우린 분명 좋은 (술)친구가 되리란 확신이 들었어요. 참고로 그의 주사는 셀카 찍기랍니다.


오늘의 추천곡은 토이 <뜨거운 안녕>이에요.


사랑했던 날들이여
이젠 안녕

달빛 아래 타오르던
붉은 입술

떠난다면 보내드리리


피아노여, 플룻이여, 골프여, 요가여, 이젠 안녕. 내년에는 드라이버와 다이버로서 반가운 안녕을 외칠 수 있기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