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곡: 브로콜리너마저 <편지>
지난주에 이어 첫사랑 이야기를 이어가 볼까 해요.
남들이 다 연애하던 학창 시절, 저는 평생 남자친구가 생기지 않을 줄 알았어요. 잘생긴 합창단 오빠나 농구 잘하는 교회 오빠를 보며 잠깐씩 설렌 적은 있었지만, 인기 연예인을 바라보는 느낌이었지 딱히 친해지려는 의지는 없었거든요. 또, 누군가로부터 사귀자는 말을 듣거나 두터운 고백 편지를 받으면 고맙기는 해도, 어쩐지 크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요.
자존감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좋다고 말하지‘ 싶어 당황스럽기도 하고, 막상 나를 알게 되면 마음이 식지 않을까‘라는 섣부른 걱정도 들고, 또 순수했을 그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당시 제가 살던 동네에는 여학생들을 추행하려고 따라다니는 변태들이 흔했어서(그리고 모두 남성이었어서), 어린 마음에 막연한 거부감도 있었고요.
그렇게 스스로의 성정체성을 의심하며 대학생이 되었는데, 다른 한국 친구들로부터 ‘그 사람’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그냥 ‘이런 한국인이 있더라’ 정도의 가벼운 언급이었는데, 무언가를 예감했는지 흥미가 생겨서 그가 나오는 다음 모임에 꼭 불러 달라고 당부했지요. 얼마 뒤 정말로 함께 밥을 먹고, 그 사람과 연락처를 교환하고, 기숙사에 돌아왔는데, 대각선 자리에서 훔쳐본 옆얼굴이 계속 생각나더라고요.
그 후로, 꽤 연상이었던 그의 입장에서는 훤히 들여보였을, 대학생 여자애의 수작이 시작되었습니다. 혹시 라이터 있냐는 문자에 없는 라이터를 사서 달려가기도 하고, 밥 먹었냐는 질문에는 같이 먹자고 할까 봐 무조건 안 먹었다고도 하고, 그 사람 집 근처에서 같이 밥을 먹다 소나기가 내리자 집에서 비 좀 피하다 가겠다고도 하고… 그 외에도 많지만 부끄러운 기억이라 여기까지만 할게요.
아무튼 몇 달 동안 쫓아다닌 끝에 그와 저는 연인이 되었어요. 그 사람을 볼 수 없을 땐 신체 부위가 도려진 듯 고통스러웠고, 함께 있을 땐 온 우주에 둘 밖에 없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 사람이 한국으로 이직한다길래 꽤 유망했던 전공의 석박사 과정도 내던져버렸지요, 뭐. 내심 실험과 논문이 내게 맞지 않다는 불안도 있었고, 20대 전부를 한 연구실에서 보내는 대신 훨씬 다채로운 경험을 쌓았으니 후회는 없지만요.
그를 만날 때 드라마 <첫사랑>의 OST인 서영은의 <내 안의 그대>에 꽤나 심취했어요. 가사에 이런 소절이 있어요.
어떡하죠 첫사랑은 슬프다는데
나 지금 누구라도 사랑하고 올까요
학생 때부터 회사원이 될 때까지 수년을 만났으니 우리는 다를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죠. 언젠가 공저자로 참여한 에세이에 순전히 제 입장에서 첫사랑을 요약한 이런 글을 썼어요.
스무 살의 첫 연애는 시작부터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내가 철없이 다가갔을 때 그는 몇 개월을 망설였고, 겨우 만남을 시작했을 때도 그는 불안해 보였다. 서로의 관계에 안정을 느꼈을 때 즈음, 나는 미래를 말했고 그는 입을 다물었으며, 제 풀에 지친 내가 결국 헤어짐을 선언하자 그는 그제야 결혼을 말했다.
늘 나보다 한 걸음 뒤에 오던 그 사람의 속도가 답답하고 때로는 상처였는데, 당시 나를 만났던 그 사람의 연령과 경험치에 가까워지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한때 ‘전남친 토스트’가 유행했죠. 혹시 그도 제가 해 주던 음식 하나쯤 ‘전여친 OOO’이라 부르며 그리워나 할까요. 이를테면, 유일하게 한식이 아니었는데 그 사람이 좋아했던 맥모닝처럼요.
맥도널드에서 오전 10시 반까지만 주문할 수 있는 맥모닝을 저는 햄버거보다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혼자서는 만들어 먹을 생각을 잘 못했어요. 이제는 저를 위해 자주 하려고, 달걀을 동그랗게 부칠 수 있는 전용 팬까지 샀답니다.
재료: 잉글리시 머핀1, 달걀1, 두꺼운 베이컨 1줄(얇은 베이컨이라면 2줄), 슬라이스 치즈 1장, 마요네즈 1T, 버터 2T
1. 잉글리시 머핀을 반으로 잘라 버터에 앞뒤로 노릇하게 굽는다.
2.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달걀프라이를 만든다.
3. 베이컨은 기름 없이 달군 팬에 굽는다.
4. 잉글리시 머핀 한쪽에 마요네즈와 프라이한 달걀, 슬라이스 치즈, 구운 베이컨을 순서대로 올리고, 남은 한쪽으로 덮는다.
오늘 일기 제목은 <내 안의 그대>에서 따왔지만, 배경 음악은 브로콜리너마저의 <편지>로 할게요.
사실 난
더 높은 곳을 보고 싶었어
더 많은 것을 하고 싶었어
있잖아 사실 난
그래도 니가 보고 싶었어
보고 싶어서 미칠 뻔했어
고백할 게 있어요. 지난가을 한국에 갔을 때, 조카를 보러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당신이 사는 아파트의, 심지어 같은 동이더라고요. 익숙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친구 집에 가는 기분이 정말 묘했어요. 그리고 속물 같지만, 당신이 샀을 때에 비해 아파트값이 두 배 가까이 올랐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조금 부러웠습니다.
고백할 게 또 있네요. 아주 오래전, 우리가 헤어지고 몇 달 뒤 마지막으로 강아지를 보러 당신의 집에 갔을 때, 새 연인이 쓴 듯한 편지를 얼핏 보았어요. 좋은 사람이니까, 금세 좋은 인연이 찾아온 거겠죠.
부디 지금도, 저보다 덜 예민하고, 술과 여행을 즐기지 않고, 짧고 붙는 원피스…는 이제 저도 나이가 들어서 잘 입지 않지만, 아무튼 당신을 걱정시키지 않는 성숙한 분과 함께이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