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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은 Dec 08. 2023

11월에 태어난 내게, 굴미역국

추천곡: 심규선 <너의 존재 위에>

제 보잘것없는 요리의 역사는 대학교 2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첫사랑을 시작했을 때로요. 홍콩에서 대학을 다니던 유학생이었지만 한국 음식을 딱히 그리워하지 않았던 저는 기숙사에서 라면 한 번 끓이지 않고, 삼시 세끼를 학교 카페테리아나 편의점에서 해결하곤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식사대용 캡슐의 개발을 간절히 바랄 정도로, 먹을 것에 큰 관심이 없었어요. 배고픔이라는 감각이 돈도 들고, 귀찮기만 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던 제가 요리를 시작하게 된 건, 좋아하는 사람의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 주고 싶어서였어요. 요리에 완벽하게 무지했던 저는 인터넷에서 미역국 레시피를 스무 개쯤 검색해, 각각의 공통분모를 분석하며 필수 재료와 가장 기본적인 조리 과정을 찾아냈어요. 시험 공부하듯 노트에 메모까지 하며 준비했던 기억이 나네요.


꼭 필요한 재료는 참기름, 미역, 마늘, 소고기, 간장. 식자재와 양념을 사러 처음 킴벌리 로드에 있는 한인 마트도 가봤고, 마른미역을 불리면 부피가 얼마나 커지는 지도 알았어요. 마늘을 갈아서 파는 데도 다 이유가 있음을 깨달았지요. 분명히 미역국 말고도 처음 해보는 반찬을 여러 가지 만들었는데, 이제는 뭐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네요. 아무튼 저와 마찬가지로 타지에서 혼자 살던 그가 생일 상을 박수까지 치며 맛있게 먹어 준 덕분에, 저는 요리에 재미를 붙여 그럭저럭 밥 할 줄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는 찌개나, 은근히 맛 내기 어려운 맑은 국에 비해 미역국은 초보자에게 다정한 편이지요. 그런데 문득 ‘내가 나에게 미역국을 끓여 준 일이 있었나’ 싶더라고요. 저는 고기보다 해물을 넣은 미역국을 좋아하는데, 마침 제가 태어난 11월에는 마트에 굴이 나오기 시작해요. 퇴근길, 통통하고 먹음직스러운 생굴을 보며 올해는 자신에게 굴미역국을 끓여주리라 다짐했어요.


최근 몇 년 동안 생일에는 휴가를 내어 여행을 갔어요. 그런데 올해는 하필이면 일주일 중 가장 바쁜 화요일인 데다가 급한 번역이 들어오는 바람에, 평범하게 출근하고 학원에 다녀와, 프리랜서 노동을 하며 차분히 보냈지요. 대신, 생일 당일만 빼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매일 밖에서 저녁을 먹었어요. 그러다 생일 주간이 끝나는 토요일이 되어서야, 자신과 한 약속이 생각났답니다.


굴미역국 끓이는 법을 검색하니, 전체적인 과정은 비슷한데 간 하는 법이 다양하더군요. 소금으로만 맑게 하기도 하고, 국간장을 넣기도 하고, 참치나 까나리, 멸치 액젓을 더하기도 하고요. 저는 액젓의 감칠맛을 좋아하지만, 한인 마트까지 갈 시간이 없어 간장만 썼습니다. 그래도 들기름과 굴 자체의 향 덕분에 제 입맛에는 만족스러웠어요. 반찬으로는 스팸과 맛살을 달걀옷을 입혀 간단히 부쳤고, 소중히 보관하던 레토르트 장조림도 꺼냈어요. 단출한 셀프 생일상에서 가장 번거로웠던 것은, 역시 마늘 다지기였네요.


재료: 마른미역 2큰술, 다진 마늘 1큰술, 들기름 1큰술, 간장 1큰술, 굴 200g

1. 미역을 물에 담아 불린다.
2. 굴을 깨끗이 씻는다.
3. 냄비에 들기름을 두르고 마늘과 미역을 달달 볶다 간장을 더한다.
4. 물 2컵을 붓고 푹 끓인 뒤, 굴을 넣고 익힌다.



생일은 누구보다 나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는 날이니, 오늘 추천곡은 심규선 <너의 존재 위에>로 할게요.


너의 존재 위에 무언가를 두지 마
꿈도 명예도 어제와 불확실한
내일 그보다 더 소중한
너의 존재 위에


세상에 중요한 일이 참 많지만, 우리의 행복보다 우선인 것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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