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기
Dolce far niente:
the sweetness of doing nothing!
(돌체 파 니엔테, 무위(無爲)의 달콤함이죠!)
엘리자베스 길퍼트 소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의 즐거움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몇 시간이나 며칠도 아닌, 1년이라는 시간을 통째로 쉬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독일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대입 대신 '갭 이어(gap year)'를 준비하는 학생이 몇 명 있었다. 196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갭 이어는 대학이나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 마음 끌리는 대로 다양한 경험을 쌓는 시간을 뜻한다. 여행과 해외 봉사, 인턴십 등 방법은 다양하다.
실제로 갭 이어를 가진 학생이 대학 진학 후 학업 성취도가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어, 일부 대학은 합격자에게 이를 장려하기도 한다.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의 딸 말리아도 하버드 대학 입학 전 1년 간 볼리비아와 페루 등지를 여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생각해 보면, 성인으로서 진로를 결정하기 전에 집과 학교가 아닌 다른 세상을 경험할 시간이 당연히 필요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공백은 재수(혹은 삼수, 사수) 뿐이다. 대학생 때의 인턴십과 어학연수는 자아 발견이라기 보단 '스펙 쌓기'가 목적인 경우가 많고,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하지 못하면 또다시 '취준생'으로서 치열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취업에 성공한 다음은 또 어떤가. 학생 때 주어지던 2,3 달 간의 방학마저 없어지고, 1주일간의 여름휴가도 눈치 보며 쓰는 신세가 된다. 목적 없이 보낼 수 있는 장기간의 휴식이 결여된 삶. 적어도 나의 10대와 20대는 그렇게 흘러갔다.
갑작스러운 공백이 찾아온 건 서른 살의 일이었다. 결혼 후 도쿄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어느 날, 남편이 1년간 싱가포르로 전근을 가게 되었고, 나는 망설임 없이 사표를 냈다. 첫 달에는 도쿄도 싱가포르도 아닌 다카마쓰라는 소도시에서 혼자 살았다. 다카마쓰는 일본인도 잘 모르는 시코쿠 지방의 항구도시로, 주변에는 수많은 섬이 있고 육지에는 그보다 더 많은 우동집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해변의 카프카>의 주인공인 15살 도쿄 소년이 집을 나와 도망친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나는 생전 처음으로 어떤 조직이나 사람, 의무에 구속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행선지를 정해 산책하고, 배가 고프면 우동을 먹고, 해 질 녘에는 해변에서 노을을 감상했다.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매 순간이 특별했다.
시코쿠는 일본에서 개발이 가장 뒤처진 곳이지만, 사람과 문화를 알게 될수록 그 소박한 매력에 반하게 된다. 사람보다 고양이가 많은 어촌 마을로 귀농한 민박집주인, 회사를 그만두고 목수인 아버지와 화과자 체험 교실을 운영하는 딸, 책을 좋아해 매년 아마추어 문학상을 개최하는 카페 주인 등 일반적인 성공의 기준과는 거리가 멀지만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깨달았다. 삶의 방식에는 정답이 없고, 세상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대체 불가능한 나만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 후 남편이 있는 싱가포르에서 지내며, 다카마쓰에 관한 최초의 여행 에세이를 출간했다. 물론, 책이 밀리언셀러가 되는 드라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마음이 맞는 소수의 독자와 동료 작가를 만났고, '글 쓰는 삶'이라는 꿈을 얻었다.
인생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달려왔다면, 잠시 멈추고 목적지를 재점검할 때다. 그 기간과 방법은 천차만별이다. 모두가 퇴사를 하고, '한 달 살기'나 세계 여행을 떠날 필요는 없다. 더군다나 스스로 입에 풀칠해야 하는 성인이 된 이상, 쉬더라도 약간의 대책은 필요하다. 한 여성이 모든 것을 버리고 자아 성찰 여행 떠나는 소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분명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자전적 이야기지만, 정작 그녀의 여행 경비는 출판사가 지원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다행히 나에게는 약간의 저축과 프리랜서 번역 일이 있었고, 공백기가 끝난 지금은 여러 가지 일을 병행하며 차기작을 준비 중이다. 직장인 시절의 안정적인 월급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후회는 없다. 그때 쉬지 않았다면 언젠가 더 큰 좌절과 방황을 겪었을 테니.
많은 사람이 나처럼 원치 않는 무한 경쟁의 궤도에 올라 얼떨결에 어른이 된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이게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인지 자문해봐야 하지 않을까. 찾아보면 누구나 그 정도 고민해 볼 시간은 있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