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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이들 Feb 05. 2021

4강_플라잉요가, 자신에게 맞는 요가가 나타날 거예요

지금은 되고, 그때는 안되었던 시간이 있죠.

플라잉 요가를 해본 것은 내가 본격적으로 요가에 빠지기 시작하기 두어 달 전쯤이었다. 그즈음엔 데이트라고 할 만한 것을 자주 하지 못했다. 바빴고, 바쁘다는 핑계가 있었고, 마땅히 새로운 데이트 거리를 생각해 내기도 힘들었다. 자주 만나긴 했지만 같이 밥을 먹고 나면, 우린 카페에 가서 곧 컴퓨터를 켰다.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사는 게 불안했고, 불안한 마음에 할 일을 계속 만들어 내었다. 점점 체력이 나빠져 갔지만 당시 나는 일을 4개나 하고 있었고, 눈을 감으면 내일까지 끝내야 할 일들과, 끝나지 않는 일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당장 눈앞에 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아 운동은 뒷전이었다.


운동만 뒷전이랴. 몸을 움직이는 일이라곤 전혀 하지 않았고, 불량 식품으로 식사를 때우기 일쑤였다. 점점 뱃살이 통통하게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짝꿍은 손바닥으로 불룩하게 넉넉히 잡히는 내 뱃살을 만지며 귀엽다고 했지만, 한편으로 건강이 걱정된다며 운동을 권유했었다. 나는 늘 '응 해야지, 할 거야' 말만 하고 하지 않았는데, 그러자 급기야 각종 원데이 운동 클래스를 신청해 주고는 같이 들으러 가자고 하였다. 운동복도 사주었다. 아마 그것은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건강한 생활로 발을 들이게 하는 일. 혹은 어쩌면 그냥 내 뱃살이 맘에 안 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즈음엔 이런저런 지적을 많이 들었으니까. 아무튼 난 여전히 운동을 하는 건 귀찮았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고, 우리는 함께 다양한 원데이 클래스 운동들을 신청하게 되었는데 그중에는 플라잉 요가 체험도 있었다. 


센터는 아늑하고 우아했다. 천장에는 색색의 천이 정글의 넝쿨처럼 매달려 있었고, 수업이 시작되기 전 사람들은 자신의 키에 맞게 천의 길이를 조정하고 있었다. 우리는 요가원에서 주는 따뜻한 웰컴 티를 마시고 수업을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이 시간이 우리가 함께하는 따뜻하고 우아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플라잉 요가를 하는 사진들을 보면 요가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웃고 계셨으니까. 우리도 둘 다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간 저녁 수업이었지만 재잘재잘 말도 많았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까진.


젠장. 처음 허벅지에 천을 끼우는 동작부터 내면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살다 살다 이렇게 아픈 건 처음이었다. 어떻게 사람들은 이걸 참고 있는 거지? 너무 아파서 화가 났다. 짜증이 났다. 게다가 무슨 동작을 하려고 하면 팔 힘은 왜 이렇게 많이 드는지. 마우스와 키보드만 두드리던 팔에 근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수업 시작하기 무섭게 팔이 달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이걸 계속하다간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더 화나는 건 나 빼고 모든 사람들은 곧잘 따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젠장!


선생님은 정말이지 특히나 우아하게 동작을 이어나갔다. 아름다운 서커스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휙휙 날아다니지? 신기했다. 내가 모든 동작에서 죽상을 짓고 있자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인상 푸세요. 아플수록 웃으세요. 여기 있는 사람들도 다 편안해 보이지만 사실 다들 아픈 걸 참고 있는 거거든요. 아름다운 동작을 하려면 참을 줄도 알아야 해요. 사실 저도 아프답니다. 호호.

나는 더욱 표정이 굳어졌다. 그 말은 내게 마치 평온한 물아래서 쉼 없이 헤엄을 치는 오리처럼 끊임없이 아픈 것을 견디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선생님도 아픈 거면 이 운동은 계속 아픈 걸 참아야 하는 운동이로구나! 나는 못해먹겠다! 나는 안 하련다!'


물론 선생님은 오랜 수련을 해서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아픔이 되었고, 나는 뭉친 데는 많고 근육은 없어 더 많이 아팠으리란 걸 이제는 안다. 하지만 지금 내 수준에서 견딜 수 없이 아프다는 건 지금의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것은 분명 태어난 이래 햄스트링이 길어 본 적이 없고, 대학을 졸업한 이래 숨쉬기 운동을 제외한 몸을 쓰는 일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인바디를 재면 근육 부족형 마른 비만이 나오던 내게 무리한 운동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무 아팠다. 견딜 수 없이 아팠다. 아픈 걸 너무 꾹 참다 보니 수업 시간 내내 스트레스만 더 받는 기분이었다.


결국 시계만 바라보며 끝날 시간만 기다리다가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옷을 갈아입었다. 터덜터덜 집으로 가기 전 우리는 요가원 근처 일식집에 가서 덮밥을 사 먹으며 플라잉 요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짝꿍의 눈치를 보아하니 새로운 경험이 재밌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근력을 쓰는 동작들에서 훨훨 날아다니더라니.(난 이미 포기하고 남들 하는 걸 쳐다보며 구경하기만 했었다.) 힘들었지만 또 하고 싶단다. 아찔했다. 난 정말 더 하고 싶지 않는데.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차마 난 더 못하겠다는 말이 안 나왔다. 울고 싶은 심정으로 'ㄴ..나도..(재밌었..어...)'라고 말하고는 그에게 무림고수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힘도 세고 매달리기도 잘 매달려서 정글 같은 천 위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것이 정말이지 무림고수 같았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집에 가서 양치를 하려고 치약을 짜는데 손에 힘이 안 들어가서 엄마한테 치약을 짜 달라고 할 지경이었다. 정말이지 다시는,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운동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몇 번 더 수업에 가야 했다. 클래스 이용권을 다섯 장이나 끊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나와 맞지 않았던 요가처럼, 이제  사람과는 만나고 있지 않다. 그즈음 우리는 종종 삐그덕 거렸고, 상처를 받았고, 지쳐갔다. 점점 아픈 말들을 견디는 관계가 되어 갔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 이가 쏟아내는 아픈 말들이 내게 상처가 되는 줄도 모르고 그래도 괜찮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플라잉 요가 같은 연애였다. 함께 누린 시간들은 반짝이고 우아하고 아름다웠지만, 물 밑에서 나는 끊임없이 아픔을 견뎌야 했다. 때때로 내 두려움도 나누고 싶었지만 그 친구는 내 불안까지 받아줄 만큼 건강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 스스로도 불안과 아픔을 어찌할 바를 몰라 내게 한껏 쏟아냈으니까. 이제와 생각해보면 어쩌면 우리는 둘 다 자신의 불안을 상대를 통해 해소하려 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 먼저 괜찮아야 둘이 되어도 괜찮은 법이다. 한 사람이 휘청일 때 다른 사람이라도 번갈아 든든했다면 좋았겠지만, 그즈음 우린 각자 휘청이는 상태로 서로에게 기대려다가 실망하고, 할퀴고, 상처를 견디고, 조금씩 포기하다가 어느   방에 무너졌다.


경험은 바보들의 도서관이라던데. 나는 바보과에 속하는 인간인지라 와장창 깨어지며 반성으로 배우는 타입인가 보다. 삶을 돌보는 일이 그렇고, 관계를 돌보는 일이 그렇다. 물론 지금도 바쁠 땐 몸이 세 개라도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젠 쉴 땐 그냥 다 놓고 쉴 줄도 알고 여러 관계를 돌보기도 하며, 무엇보다 나를 돌보기 위해 애쓸 줄 안다. 뱃살이 오동통하게 나오던 때와 달리 지금은 근육도 조금 붙었고 밥도 잘 챙겨 먹는다. 슬프게도 그 시절의 관계는 파탄 나듯 끝이 나 버렸지만, 그럼에도 그 관계 속에서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인지 헤어진 그 이도 우리의 부서진 관계 가운데 또 좋은 것들이 남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길 어느새 빌 수 있게 되었다.


아마 그때의 나는 요가를 알지 못해서 아픔이 있을 때 참는 법만 알았을 테다. 지금의 나는 아픔이 몰려올 때 호흡을 하는 법을 배운다. 물론 배움이란 머리로만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익히는 과정이 필요해 끊임없는 수련이 계속 필요하겠지만, 요가를 조금 더 일찍 시작했다면 나는 그 관계에서 조금 덜 아플 수 있지 않았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지금의 내가 플라잉 요가를 다시 배우러 간다면 이번엔 썩 즐겁게 수련할 수 있을까? 하지만 모든 일엔 각자의 때가 있다. 그 당시 나의 체력과 건강상태로 플라잉 요가를 감당하기엔 너무 벅찼다.


수련은 즐거워야 한다. 즐겁지 않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다른 즐거운 것을 찾아보는 게 좋을 테다. 어떤 사람에게 좋은 것이 내게도 꼭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요가도 그렇다. 맞는 요가가 있고, 맞지 않는 요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맞지 않는 요가라고 할지라도 인생의 다른 시기에 만나면 또 즐겁고 유익해서 오래 하게 될지도 모른다. 요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요가는 아쉬탕가인데, 아마 그즈음엔 아쉬탕가를 배웠어도 나는 똑같이 힘들기만 하고 재미없다고 했을 것이다. 연애도, 요가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인연을 억지로 이을 수는 없는 것처럼 요가도 지금 자신에게 맞는 적절한 요가와 적절한 때가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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