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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인 Oct 17. 2024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보는 일

오래 사세요, 다니엘 아저씨

다니엘 아저씨가 키우시던 개 이네스가 죽고 우리는 몇 년 간 서로 아는 척을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아저씨가 일방적으로 인사를 피했다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이네스가 죽은 날 아저씨는 예약해 둔 어린 강아지를 데려와 사장님과 내게 소개를 시켜주었죠. 우리는 너무도 놀랐고,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어요.


"아저씨, 오래 사셔야만 해요. 이 어린 개를 위해서."


'위그'라는 이름을 가진 회색 개는 우리 가게 쇼윈도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고집스럽게 서 있었습니다. 난감해하는 주인아줌마에게 들어오셔도 된다고 한 후부터 위그는 내가 일하는 날, 어쩌다 데이지를 데리고 오는 날이면 오후 산책 시간에 가게에 들르곤 했지요. 거친 회색털의 귀여운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위그는 데이지를 좋아했어요. 개들의 세계에서도 외모나 종에 따라 호불호가 나뉘는 모양인지 데이지는 자신과 비슷한 사이즈의 개나 푸들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체구가 비슷한 위그를 데이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죠. 그럼에도 오직 데이지만 바라보는 위그가 귀여워 쓰다듬어주면 그는 너무도 무심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습니다. 새카만 인중에 고집스러운 입술을 앙 다물고서. 

위그를 데리고 다니시는 아줌마는 위그의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위그의 주인은 연세가 많으셔서 거동이 불편해 위그의 산책을 이웃에게 부탁했던 것이었어요. 위그의 주인 할머니가 아파서 병원에 실려가는 날이면 위그는 이웃집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줌마는 난색을 표했어요. 주인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위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위그의 고집스러운 까만 인중을 한참 쳐다봤습니다. 주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위그가 정말로 갈 곳이 없어지면 그는 동물보호센터로 갈 것이 분명합니다. 데이지를 데려오기 전 여러 동물보호센터를 다니다가 수많은 개들이 그만큼 많은 각각의 사연들로 센터에 오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주인이 죽어서, 커플이 헤어지게 돼서, 큰 개를 감당할 수 없어서...


다니엘 아저씨에게 오래 사시라고 했던 말은 이런 염려에서였습니다. 가족이 없는 아저씨의 고독을 이해하는 것보다 아저씨의 새로운 어린 개가 훗날 위그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던 거지요. 마음이 상한 아저씨와 아저씨가 왜 마음이 상했는지를 이해 못 한 나는 2년 정도 데면데면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저씨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큰 수술을 앞두고 있고, 그동안 아저씨의 개는 아저씨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요. 방광암에 걸린 아저씨는 생각보다 덤덤했습니다. 항암 때문에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살도 많이 쪘지만, 아저씨 특유의 비꼬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건 여전했지요. 수술을 한 후에는 배에 구멍을 뚫어 소변이 바깥으로 배출되게끔 한 상태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며 티셔츠를 뒤집어 배와 연결된 비닐봉투를 굳이 보여주시고야 마는 아저씨를 보고 역시 다니엘 아저씨 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고약한 농담을 잊지 않는 아저씨. 

주인공이 암에 걸리고 나서 사이 나빴던 가족들과도 화해를 하고, 눈물바다가 되는 우리나라의 가족드라마처럼 아저씨와 나도 그의 병 이야기를 하며 다시 친해졌습니다. 하루에 세네 번씩 꼬박꼬박 개와 산책을 하시는데 그 개로 인해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몇 마디라도 더 하고, 또 개를 좋아하는 다정한 이웃들과 교류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개가 없으면 바깥에 나갈 일도, 사람들과 대화를 할 일도 없을 거라는 아저씨를 적막 속에서 구원한 건 다니엘 아저씨의 개들이었습니다.


내가 아저씨에게 했던 말이 아저씨 입장에선 불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시간이 흐르며 내가 프랑스인들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시어머니와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별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불같이 화를 내신다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이 종종 있었지요. 내 입장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말이 프랑스인에게 들어갔을 때, 우리 사이에는 무수한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어 다른 나라의 언어가 주는 미묘한 뉘앙스까지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했던 겁니다. 가령 한국에서는 오랜만에 누군가를 만났을 때, 살이 많이 빠졌다거나 얼굴이 핼쑥하다는 식의 표현이 그간의 안부를 묻는 것과 비슷한 인사라면 프랑스에서는 어지간해선 외모와 관련한 말은 잘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소한 차이로도 오해가 발생할 수 있으니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가닥 떨어지는 유성우를 발견하겠다고 기다리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배워도 다 알 수 없을 프랑스어로 이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일이 답답하고 막막한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결국은 이 모든 게 사람과의 일이라 눈앞에서 유성우를 본 것처럼 환희의 순간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다니엘 아저씨의 고독과 나의 처지가 약간은 닮아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우리는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서서 떠듭니다. 그렇게 아저씨와 나는 다시 비주를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아저씨 오래 사셔야 해요. 아저씨의 어린 개와 우리들을 위해서." 

이번엔 속으로만 생각을 하고 내뱉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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