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터슨과 로라처럼
우린 언제 어디서든 접속되어 살아간다. 잠들기 전에 휴대폰을 충전하고 일어나서 시간을 확인하는 것도 휴대폰으로 시작된다. 잠을 자는 휴면 상태에도 화면에는 적잖은 접속의 흔적이 남아있다. 인사나 안부를 전하고 약속을 잡고 중요한 정보를 수신할 때도 ‘말’은 네트워크의 무시무시한 속도와 정확성에 밀려났다. ‘좋아요’와 ‘이모지’로 감정과 표정을 대신하고 수신 여부를 화면에 뜬 ‘1’의 유무로 확인한다. 언제든 접속 가능한 네트워크의 발전은 기다림을 무색하게 하고 오히려 시간을 못 견디게 만들었다. 대화를 통해 쌓이는 감정과 정보보다 네트워크로 이루어지는 이미지와 활자의 양이 많다 보니 타인과 만나지 않고도 계속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보고 듣고 먹고 생각한 것들은 이미지로, 무미건조한 활자로 실시간 소비된다. 더 알고 싶거나 궁금할 여지는 별로 없다.
얼마 전 SNS를 보다가 서점을 운영하는 사람이 소설을 찾는 손님에 경이를 표하는 모습에 놀랐다.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이야기에 대한 갈망이 없으면 소설을 찾는 손님을 서점원이 신기해하는 현상이 벌어질까. 기기의 접속 안에서 유영하는 이상 만남을 전제로 하는 대화는 귀해지고 누구도 품을 들여 이야기를 해석하거나 상상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 <패터슨>을 보면 ‘관계’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영화는 월요일부터 일주인간 주인공 ‘패터슨’의 일상을 담고 있다. 버스 운전사인 패터슨은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회사 유니폼을 입고 사랑하는 아내 ‘로라’가 싸준 점심을 들고 출근한다. 퇴근 후에는 반려견 ‘마빈’과 산책을 하고 동네 바bar에서 맥주를 마신다. 패터슨은 휴대전화나 노트북과 같은 기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가 일할 때 확인하고 집중하는 건 시계와 버스에 탄 사람들의 대화 정도이다. 사람들의 대화는 특별할 것 없지만 패터슨의 시선에는 온통 호기심으로 비친다. 그런 이유로 운전석에 앉은 패터슨이 1인칭으로 바라보는 풍경은 도심과 빽빽한 건물이 주가 아니라 버스를 타고 내리고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이다. 그는 틈틈이 몰아 봐도 다 확인하지 못할 타인의 SNS를 확인하는 대신 일과를 마친 후 맥주가 담긴 컵을 앞에 두고 바의 주인과 시시껄렁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산책 중 지나던 빨래방에서 랩을 연습하는 사람의 가사에 매료되어 먼저 말을 걸기도 하고 매일 비슷한 푸념을 늘어놓는 회사 동료에게 오늘 기분이 어떤지 묻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패터슨의 하루하루가 조금 다른 이유는 시를 쓴다는 것이다. 노트에 시를 눌러쓰고 스크린에 그의 육성과 함께 활자로 시가 흐르는 모습은 예측 불가한 개인의 내밀한 삶을 상상하게 한다. 로라는 특별한 직업 없이 매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컵케이크를 만들거나 집 안의 온갖 패브릭에 자신이 좋아하는 무늬와 그림을 그린다. 매일 규칙적인 일상을 사는 패터슨과 자유분방한 로라가 한 집에 산다는 것만으로 갈등을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로라는 출판을 하지 않고 노트에만 글을 쓰는 남편을 걱정한다. 패터슨은 얼마나 연습할지도 모를 새 기타를 사달라는 로라를 마뜩잖게 바라보지만 거기까지다. 외려 로라는 패터슨의 시를 끊임없이 칭찬하며 잃어버리지 않도록 복사해두기를 권하고 패터슨은 기타를 연습하기 시작한 로라에게 최고의 컨트리 가수가 될 거란 말을 한다. 상대가 어떤 모습이든 서로의 행복을 응원한다. 승자가 없는 핑퐁 게임을 하듯 경쾌하게 행복을 주고받는다. 등장하는 사람들이 영화의 행으로, 그들의 일상이 모여 연이 된다. 영화는 삶이라는 한 편의 자유시를 닮았다.
날로 휴대전화의 화소수가 높아지고 저장용량이 커진다고 해서 만남의 빛깔이 선명해지고 소통의 깊이가 넓어지지 않는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기기의 힘을 빌리는 편이 수고를 덜어준다는 이유로 기댔던 것도 사실이다. 얼마나 많은 지인의 생일과 새해 인사, 안부를 목소리가 아닌 메시지로 대신해 왔는지 헤아릴 수도 없다. 텍스트, 알람, 다이렉트 메시지로 때운 자리는 오로지 날짜와 발신· 수신의 시간으로 증명될 뿐이다. 가족들과 자주 전화하고 이야기하지만 그럼에도 가끔 대화가 고플 땐 라디오나 팟캐스트를 듣는다. 라디오는 예전처럼 음악을 즐기기 위한 매체로서의 매력을 잃은 지 오래여도 누군가의 일상이 담겨있다. 직장 스트레스, 고민, 가족 이야기, 일과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디제이의 육성으로 듣는다. 이름도 직업도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 보면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라는 위안을 얻는다.
기기의 속도는 매일 또 다른 한계를 향해 나아가지만 끊임없는 접속의 시대에서 관계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싶진 않다. 차 한 잔에는 뜨거운 물과 찻잎이 필요하다. 오래 우려내든 적당히 우려내든 뜨거운 물과 찻잎은 만나야만 빛깔과 향을 가진 한 잔이 된다. 마음도 말도 만나지 않고서는 온기를 느끼기 어렵다. 지금 만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안부를, 근심하는 목소리를, 위안을 주고받으며 살고 싶다. 패터슨과 로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