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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Feb 19. 2018

우리는 매일 일상으로 돌아온다



당연해도 계속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생활의 흔적은 또다시 생활을 위해 저마다의 제자리를 찾는다. 잠을 자고, 새로운 아침을 맞고, 먹고, 배설하고, 일 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 청소도 마찬가지다. 가끔 멍해지거나 의욕이 떨어질 때 샤워를 하거나 문을 활짝 열고 청소를 한다. 주변을 깨끗이 한 자리에 오로지 나만 어질러진 듯 널브러지는 즐거움이 있다. 반복되는 일을 부지런히 하다 보면 다시 의욕적으로 살 수 있는 원점이 보인다. 살아 있는 한 일상의 매듭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반복을 통해 이어진다. 그것을 실체로 가늠하고 따진다면 삶은 엄청 지루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일상의 반복은 의식적으로 가늠하기 어렵다. 강물이 흘러가는 걸 보는 것처럼 끊임없는 유속의 흐름을 바라보는 입장이 아니라 그 자체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삶의 유속에서 잠시 떨어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우선 여행이 그렇다. 여행의 기분은 떠나 있을 때만 효력을 발휘한다. 마주치는 장소, 사람, 음식, 날씨는 또 다른 일상에 닿는 일이고, 동시에 기존의 일상은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상태가 된다. 여행은 새로운 장소에 적극적으로 자신을 방치함으로써 일상을 낯설게 바라볼 가교가 되어준다. 물론 떠나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일상은 무심하게 이어지지만 여행을 통해 열린 감각들이 남아서 떠나기 전과 다른 마음의 여유공간이 생긴다. 오랜만에 마주한 보금자리와 사람들과 주변 환경은 이곳이 마땅히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사실을 새로 상기시킨다. 그리고 일상의 자리에서 잊고 지내던 감사와 소중함을 재확인한다.      


살고 있다는 무의식에서 잠시 떨어진 기분이 드는 또 다른 일은 제사다. 우리 집은 일 년에 세 번 제사를 지낸다. 엄마는 시집을 와서 30년 넘게 남편 집안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어릴 때는 명절에 제사를 지내면 그저 먹을 게 많아서 좋았다. 절을 할 때는 앞에 어른들의 엉덩이가 보여서 웃음을 참기 바빴다. 제사는 조상에 대한 예를 갖추는 의식인 걸 마음으로 알았다기보다 어른들이 풍기는 분위기로 짐작했다. 향냄새와 기름 냄새가 섞인 제사상은 빈틈없이 음식들로 가득했다. 제사가 끝나면 어른들은 상에 둘러앉아 음복을 했고, 나와 동생은 상 주변을 오고 가며 먹고 싶은 음식을 골라 먹었다. 그렇게 명절이 끝나도 음식은 남아서 몇 날 며칠을 해치우다시피 했다.


머리가 크면서 제사를 바라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다. 사람이 더불어 사는 걸 가장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게 먹는 일인데, 산 자는 음식을 차려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고 안부를 물을 뿐이다. 놋그릇에 담긴 제주(祭酒)는 비워지지 않는다. 음복을 하니 배는 부르지만 마음이 헛헛하다. 할머니는 혼백이 죽을 때의 나이와 모습으로 찾아온다고 하셨다. 음식 냄새를 맡고 모이는데 영정 사진을 놓은 자리에 앉는다고 한다. 우리 집은 지방을 써서 신주를 놓지 않기 때문에 사진을 놓고 절을 한다. 오랜 세월 제사를 지내다 보니 이제는 절을 할 때 왠지 돌아가신 분을 의식적으로 마주하는 것 같다. 햅쌀로 지은 밥과 소고기 뭇국에서 올라오는 희멀건 김이 사진 앞을 어른거린다. 어릴 때는 막연한 소원을 빌었지만 이제는 소원 같은 걸 생각하지 않는다. 제사를 지내는 순간만큼은 죽음과 살아있음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걸 느낀다. 그들은 한 때 존재했고 이제는 넋으로 이승을 찾는다. 나는 다시 일상을 살아가겠지만 그들은 어디로 돌아가는 걸까. 살면서 잊고 지내는 기억이나 혼백을 기리는 의식은 어차피 드러날 실체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실체가 없다고 해서 무가치하지는 않다. 살면서도 망각하는 것들이 삶의 품 안에 숨어있다.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어떤 기억은 살고, 어떤 기억은 희미해지다 사라지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그 경계의 모호함을 제사에서 느낀다.


여행과 제사의 의식은 결국 일상으로의 복귀를 극적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다. 여행을 통해 내가 머무는 세상의 빛깔을 바라보고, 일상의 해상도를 높인다. 제사를 지내는 건 죽음 너머의 일을 가늠해보는 일이다. 존재에 대한 기억을 예스럽게 조우하고 나면 산 자는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에 이른다. 여행이든 제사든 일상으로 되돌아온다는 건 온전히 나를 마주하고, 멈추지 않고 나아가야 할 자리를 확인하는 일이다. 반복의 미는 되감기 버튼이 없는 일상의 재생에 있다. 그저 다시 살고 있다는 무의식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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