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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Jun 25. 2018

ok한 하루

오늘의 작은 즐거움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있는 ok마트에 들렀다. 이곳은 그날그날 손님을 끌 만한 주력 야채나 과일을 바깥에 꺼내놓고 판다. 버스 정류장 바로 뒤에 있어서 사람들로 북적이기도 하고 오늘은 뭘 내놓았을지 궁금해서 눈길이 가는 곳이다.


박스를 잘라 매직으로 크게 써 놓은 가격이 눈에 띈다. 애호박 4개 980원, 가지 4개 2000원, 천도복숭아 491그램에 4900원, 좋아하는 체리도 대형 마트에 비하면 저렴하다. 딱히 살 게 없는데도 마트에 들어갔다. 버스는 자주 오니까 환승 시간 안에 보면 될 일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헤드 마이크를 찬 직원 아저씨가 열심히 홍보를 하고 있었다. “방금 점장님이 급하게 콜 하셔서 부추 가격 내립니다. 오늘 저녁엔 부추추추. 가족들 건강 좀 챙겨주세요. 가격도 오케이. 그래서 여기가 오케이 마트입니다.” 아저씨의 경쾌한 “추추추”가 마트의 공기와 함께 둥둥 떠다녔다.


일 잘하는 재밌는 아저씨라고 생각하면서 뭘 살지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일요일 잘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은 오케이 마트에서 쇼핑 오케이?” 

매대에 잔뜩 쌓인 표고버섯을 갈무리하면서 쉬지 않고 멘트를 하는 아저씨의 리듬이 재밌었다. 다음 멘트는 무엇일지 궁금하게 만드는 라디오 방송을 듣는 기분으로 천도복숭아와 체리를 골랐다. 그러다 애호박 4개 980원 앞에서 멈춰 섰다. 살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속으로 ‘너무 싸다’를 외쳤지만 아무래도 2인 가족에게는 너무 많은 양이다. 아저씨의 말이 끊길 틈을 타서 애호박을 한 개만 살 수 있는지 물어봤다. 아저씨는 나를 슬쩍 보더니 마이크 소리 그대로 “아이고, 이렇게 싼데 4개 사서 윗집 오빠 아랫집 언니랑 나눠 드세요. 우리 베풀고 살아요.”라고 했다. 자동응답기처럼 술술 흘러나오는 참신한 멘트에 예상치 못한 웃음이 터져서 안쪽에 있는 정육 코너로 피신하다시피 했다.  


아저씨 말은 재미도 있었지만 일리가 있었다. 애호박 네 개를 나눠 먹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이럴 때 엄마나 동생네랑 더 가까이 살면 좋았을 텐데 아쉬웠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흔했을 때는 애호박 여러 개를 숭숭 썰어 넣고 수제비나 칼국수를 푹 끓여서 함께 먹었을 테지만 지금은 나눌 이웃조차 없다는 게 조금 쓸쓸했다. 한편으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하루 중 처음 웃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일요일 오후 6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웃지 않은 것도 놀라웠지만 여기서 웃게 될 줄도 몰랐다. 다시 아저씨의 멘트가 들렸다. “자자, 오늘 오케이 마트가 처음이신 분 있나요? 있으면 손 들어보세요. 애호박 한 개 제가 쏩니다.” 내가 정육 코너에서 쭈뼛거리는 사이 벌써 누군가가 손을 든 모양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애호박 이벤트는 오직 하나만 원하는 진상 고객의 마음을 헤아린 깜짝 선물 같은 거였다. 아저씨의 말이 끝나자마자 달려가야 했는데 삼겹살에 정신이 팔린 탓에 기회를 놓쳤다. 뻔뻔하게 “저요!” 할 자신도 없었다. 결국 애호박은 사지 않았다. 버스에 앉아 뒤늦게 멘트를 상상했다. “오케이 마트가 처음은 아니지만 처음 왔다고 해도 주나요?”라고. 이렇게 정직한 거짓말을 해서라도 아저씨처럼 재치 있는 응수를 했다면 좋았을 걸!


사실 애호박 한 개를 놓친 것보다 아저씨의 말들이 추임새처럼 둥둥 떠다녀서 좋았다. “자자, 어서어서 고르세요. 점장님 콜 왔을 때 얼른 골라가세요.” 릴레이처럼 이어지는 리듬을 뒤로하고 마트를 나오는데 한 번 올라간 입꼬리가 그대로였다. 아직도 웃고 있는 스스로가 이상해서 또 웃었다. 피식거리는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일요일 오후, 해는 꽤 길게 남아있었고 과일과 야채가 든 빵빵한 가방을 이고 지고 집에 도착할 때쯤엔 어딘가 가벼워졌다는 걸 느꼈다. 사소하게 즐거운 순간이 있어서 그냥 ok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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